120살 활명수로 살펴보는 한국 근현대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 잘 쇠셨는지요? 가족, 친지를 만나 쌓인 회포도 풀고, 아이들의 재롱도 보면서 정을 나누는 명절에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평소와 다른 기름진 식단과 과식 때문에 배탈이 나기 쉽기 때문이지요. 설과 한가위 다음 날에 가장 잘 팔리는 약이 소화제이기도 합니다. 먹을 게 없어 명절 때만 되면 배가 터지도록 먹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아무래도 설의 분위기와 오랜만에 모여 같이 밥을 나누는 정 때문에 평소와 달리 과식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과식이나 소화불량으로 약을 찾는 손님들 때문에 약방은 설 특수를 맞기도 한답니다. 오랜 세월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소화제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궁중 무관인 선전관(오늘날의 대통령 경호관) 출신 노천 민병호에 의해 1897년 탄생한 활명수는 한국 최초의 브랜드이자 최장수 의약품이기도 합니다. 활명수가 세상에 나온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약은 구하기가 어려워 급체나 심한 설사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활명수는 조선 민중의 아픈 속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 그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조부모님 때부터 마셔온 활명수는 구한말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역사와 궤를 같이했습니다. 오늘은 120년간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를 통해 지난 역사를 한번 돌아볼까 합니다.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

 

 

활명수의 발상지, 정동


정동과 서소문 일대는 한국 최초(最初)이자 최고(最古) 브랜드인 활명수의 발상지입니다. 정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급변하는 한국 근현대사가 오롯이 압축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비롯한 일제의 무력시위가 진행된 가운데 아관파천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 또한 정동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2대 주인인 민병호의 아들 민강의 지원 아래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결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연통부가 비밀리에 설치되기도 했죠.

 

서울연통부 기념비

 

활명수의 아버지 민병호는 고종의 어의이자 제중원 의사였던 알렌과의 인연으로 서양의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에서 새롭게 알게 된 서양의학과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궁중 비법과 한의학 지식을 융합하여 활명수를 만들어냅니다. 최초의 현대식 국립병원이었던 제중원 이야기가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활명수'의 탄생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드라마 29회에 등장하는 '박하맛 나는 소화 물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실제 활명수 탄생 이야기를 드라마의 배경에 맞춰 각색한 것이긴 하지만, 활명수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비교적 충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으로 다뤄질 정도로 의미 있었던 최초의 서양식 국립 의료기관 제중원은 조선 사람과 서양의학이 만나는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만남과 관계 속에서 탄생한 활명수는 한방과 양방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낳은 옥동자와 같았죠. 하지만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많은 백성이 본토를 떠나 중국 만주로, 러시아 연해주로, 미주 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갓 태어난 활명수 앞에는 나라 잃은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과 동행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활명수와 조선 독립 그리고 경제자립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 궁궐의 용도를 마음대로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창경원으로 바꾼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일본은 헌병경찰 제도를 시행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잡아들였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민족지사들의 활동을 탄압했습니다. 또한 농업과 상공업 등에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합니다.

 

경복궁의 건물 일부를 허물고 상업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오늘날의 산업박람회)를 개최한 일은 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행사였습니다. 조선 기업인들은 이 공진회 참가를 두고 고민이 컸습니다. 조선에서 벌인 첫 박람회였지만 동시에 일제 식민통치를 만방에 알리는 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밉지만 사업의 홍보와 판촉을 위해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은 공진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마련된 수익금은 그가 설립한 소의학교에 기부했으니 동화약방으로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나름의 방법으로 이용한 셈이죠. 이 공진회를 계기로 조선의 지식인층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독립과 경제자립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민강 사장은 약업으로 이룬 집안의 부를 사회를 위해 사용해왔습니다. 접근성이 좋은 경성부 내의 동화약방 점포는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과 연락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엔 그의 과감한 행동이 기업의 자랑이 되었으나, 일제치하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은 물론 사업과 집안의 몰락을 불사한 용단이었죠. 독립운동에 참여한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회사는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장이 현장을 지키지 못하고 투옥되어 있거나 해외로 나가 있으니 사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죠. 활명수뿐 아니라 동화약방의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활명수의 모기업 동화약방에 큰 위기가 닥친 1920년대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가치만 놓고 보자면 분명 마이너스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를 기점으로 동화약방은 무형의 자산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동화약방이 힘쓰는 노력이 알려지자 해외 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만주, 미국 하와이에서 활명수를 찾는 이가 늘었다는 자료도 있으니까요. 오늘날 활명수 브랜드에 깃든 무형의 자산 가치는 그때 그 시절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활명수,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


조선 유일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 방송국에서 1936년 한 경기가 생중계됐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경기였습니다. 비록 일제 식민치하에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경기였지만, 손기정 선수는 자신을 'Korean'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승 후 작성한 방명록에도 기테이 손이 아닌 ‘손긔정 KOREAN’이라고 써서 떳떳한 조선 남아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힘으로 약소민족을 짓밟고 있던 군국주의에 대한 그만의 저항이기도 했지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후 여러 기업에서 그의 승리를 모티브로 활용해 광고를 했습니다. 동화약방의 활명수도 우승 다음 날인 1936년 8월 11일 《조선일보》에 우승 축하광고를 게재합니다.

 

반도남아의 의기충천

손기정, 남승룡 양 선수 우승축하


건강한 체력, 견인불발하는 내구력에 근원은

오직 건전한 위장에서 배태된다. 

건강한 조선을 목표하고

다 같이 위장을 건전케 하기 위하여

활명수를 복용합시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축하하고 건강한 위장을 위해 활명수를 마시자는 기업 이미지 광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이나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이상 가는 민족적 경사 앞에서 동화약방은 민강 사장이 사망한 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와중에 과감히 축하광고를 실었습니다. 식민지 시절 조선 선수의 세계 제패는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막힌 속을 뚫어주는 청량제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세를 과시하던 히틀러는 3년 뒤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세계를 다시 한 번 참혹한 전쟁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역사는 파국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한여름 시원한 냉수와도 같았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는 정확히 56년 뒤인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달린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으로 다시 한 번 재현됩니다. 1936년 암울했던 시절 광화문 광장에 모여 손기정과 남승룡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손자, 손녀들이 66년 뒤인 2002년 여름 광화문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을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손기정의 세계 제패를 기념하던 활명수의 광고 문구인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은 그렇게 실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활명수 광고 속 전화기와 자동차


1950년 안타까운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는 일은 국가적인 과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수출 전략과 민족 특유의 근면성을 바탕으로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경제개발을 이뤄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정치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경제가 점차 발전하자 우리 정부는 경공업을 넘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이 다 이때 만들어졌죠. 생활수준이 조금씩 향상됨에 따라 나름의 소비문화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자식 교육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에 대한 욕망은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고 계층을 형성함으로써 가치와 부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1960~1970년대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전화기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손에 하나씩 들고 있지만, 그 당시엔 동네에 전화기 한 대 있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전화 신청이 밀려 백색전화 한 대 값이 250만 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유할 수 있어 사고팔 수 있는 백색전화는 투기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80킬로그램 쌀 한 가마니 가격이 6만 3000원 정도였고 서울 시내 집 한 채 값이 250만 원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전화기 값이 비쌌는지 알 수 있죠. 


"하루가 끝나도 내일의 일이 또 남아 있습니다. 전화연락할 일, 만나야 할 중요한 약속시간 때문에 대식가로서 또는 애주가로서 먹고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다?"라며 활명수를 권하는 광고가 신문에 게재됩니다.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였습니다. 1968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활명수 광고에 처음으로 다이얼 전화기 그림이 등장하는데요, 이는 아직 전화기가 일반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전화기 옆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익숙한 전화 그림을 넣은 것이었죠. 활명수의 전화기 그림 광고에서 현대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문명의 이기인 전화기를 사용하는 타깃 고객인 직장인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 동화약품의 고민의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70년 8월 17일 《동아일보》 활명수 광고에는 자동차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1903년으로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포드 자동차를 들여온 것이 처음이었다고 하지요. 선택받은 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것. 당시 자동차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 우리나라는 미군이 남기고 간 자동차의 부품을 활용하여 조악한 디자인과 성능이긴 해도 운행에는 문제가 없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시발(始發)’ 즉,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죠. 이 시발 자동차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언젠가 차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1968년 전화기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와 1970년 자동차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는 당시 보통 사람이 소유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가치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화기와 자동차가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활명수 광고에 담겨 있던 이상이 실현된 것이죠.  


 

과음, 과식의 시대에도 활명수


19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농업 생산성이 향상하면서 어느 정도 먹을거리 문제가 해결되자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것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던 고단백 고칼로리 음식을 평소에 먹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과음과 과식을 하는 이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활명수도 이런 시대적 변화에 발맞췄습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과음'과 '과식'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5월 13일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과음 과식을 하지 맙시다!"라는 캠페인성 광고가 실립니다. 광고 문구를 보면 "언제나 튼튼하고 건강한 위를 위해서는 위에 부담을 주는 과음, 과식을 피하고 항상 알맞는 양의 음식을 규칙적으로 드시도록 하십시요.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반드시 규칙적인 식생활만을 하기란 어려운 일! ― 뜻밖의 과음, 과식을 하셨을 때는 곧 알파활명수를 복용하십시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현대인의 과음, 과식에 적절히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활명수 복용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과음, 과식 그리고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경제 발전으로 예전보다 풍요로워졌지만 물질적 풍요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바쁜 생활 속에서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한 끼 식사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2010년에 이르러 활명수는 가족식사를 제안하는 '맑은 바람 캠페인'을 제안합니다. 광고는 "하루 한끼, 가족이 밥상에서 만나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출처 - 동화약품

 

한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소비자들은 편의점에서도 간편하게 활명수를 구매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 2011년에 드링크제, 액제 소화제, 외용연고 등 48개 품목의 일방의약품을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의약외품으로 지정합니다. 소비자의 구매 편의성에 대한 요구가 이어지자 동화약품은 이를 수용하여 의약외품으로 전환된 제품 중 부채표 '까스활'을 출시합니다. 까스활의 탄생은 편의점과 대형마트의 대중화로 인한 소비 형태의 변화와 이에 따른 액제 소화제 시장의 트렌드와 현행법에 맞게 활명수의 브랜드를 적절하게 공유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죠.

 

활명수 하면 자연스럽게 부채표 상표가 떠오릅니다. 부채표는 활명수의 초창기부터 함께했습니다. 부채표 상표는 활명수 병 라벨에 브랜딩되어 100년 이상을 우리와 함께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활명수 하면 곧 부채표를 생각하는 것이죠. 동화약품이 최근에 출시한 미인활명수의 병 디자인을 보면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위에 새겨진 부채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디자인 안에 담긴 활명수의 가치를 음미합니다. 활명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소비자의 요구와 감각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제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10년 뒤 20년 뒤 활명수의 병과 라벨 그리고 부채표 상표는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출처 - 동화약품

 

2016년 올해로 딱 119년.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겪어온 활명수의 나이입니다. 근 120년간 활명수는 한국인의 지친 속을 달래주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 중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소비자의 99.8퍼센트가 활명수를 알고 있으며 연간 1억 병이 생산됩니다. 한마디로 활명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입니다. 활명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혼란과 전쟁,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 그리고 민주화와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주었습니다.

 

1897년 이래 활명수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처음 등장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활명수는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할 것입니다. 활명수가 미래가치를 담아 소비자와 사회에 더 많은 일을 할 때입니다. 120년간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과 동고동락한 활명수의 이야기를 담은 책,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에 오늘 전하지 못한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꼭 읽어주세요!

 

생각비행이 펴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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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와 《나쁜 나라》

지난 1월 12일, 안산 단원고에서 눈물의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학생과 교사 등 262명이 희생되어 2000년대 최악의 사건으로 한국 역사에 기록될 세월호 참사. 해가 두 번 바뀌어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만 아직 배에 희생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 참사의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 아이들과 유족들의 억울함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생존 학생들이 졸업할 정도로 시간이 지난 지금, 세월호 참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출처 – 서울신문



망언만 무성했던 세월호 청문회

 

생각비행은 지난 연말 피해자들의 뒤통수를 치듯 한일 양국 간 졸속으로 합의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말씀드리며 박근혜 정부가 과연 세월호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아니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을지 우려된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예상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진상 규명은 커녕 이를 수습할 의지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밝혀지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세월호 진상 규명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출처 – 세월호 유가족방송 416 TV 유튜브


지난해 12월 14일에 열린 세월호 참사 특조위 1차 청문회 당시 구조에 나섰던 해경이 유족들 앞에서 배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철이 없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아 탈출하지 못했다는 망언을 해 큰 분노를 샀습니다. 그 외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로 일관했습니다.


그들로서는 기억이 나면 큰일 나긴 할 겁니다. 《미디어오늘》의 취재 결과를 보면 당일 구조 임무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해경123정은 현장 도착 직후부터 사진과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느라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청와대는 세월호 승객을 구조해야 할 골든타임에 해경 핫라인 등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할 사진과 영상 자료를 보내라며 최소한 7차례 이상 독촉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청와대는 다른 일 하지 말고 영상부터 띄우라고 독촉하기도 했습니다.


10시 25분의 핫라인 통화에선 다음과 같은 지시가 내려진다. 


청와대: 오케이, 그다음에 영상시스템 몇 분 남았어요?

해경: 거의 10분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청와대: 예.

해경: 10분 이내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청와대: 거 지시해가지고 가는대로 영상바로 띄우라고 하세요. 다른 거 하지 말고 영상부터 바로 띄우라고 하세요.

해경: 예.


[단독] 해경 세월호 현장 도착해서 한 일은 청와대에 카톡 전송


구조하러 간 해경에게 구조보다 먼저 영상부터 띄우라고 했으니 박근혜 정부의 일 처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한 사진과 영상 자료를 요구하던 청와대는 정작 구조를 위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고, 구조를 위한 지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보고를 받아야 할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은 지금도 오리무중입니다.



해수부 공무원이 세월호 유족 고발하라고 사주했다


사태 예방과 수습에 놀랍도록 무능했던 박근혜 정부는 이후 세월호 참사를 국민의 기억에서 지우는 데는 기가 막힌 조직력과 행동력을 선보입니다.

 

출처 - KBS


세월호 참사 보도가 어느 순간부터 TV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들지 않으셨나요? 청와대에서 직접 개입해 세월호 보도를 막은 사실이 폭로되었습니다. 그것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망언으로 논란을 낳았던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이 폭로한 것입니다. 청와대가 길환영 KBS 사장을 통해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해경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해 청와대가 KBS 인사에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도 터져 나왔습니다. 과연 청와대의 이런 개입과 조작이 KBS에 국한된 것이었을까요?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열렬히 지지하며 전범기를 꺼내 들기까지 한 홍위병들처럼 세월호 416연대 내에 보수단체 회원이 암약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세월호 참사 피해 유가족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416연대)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래 가입해 동향을 살피고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확산시켜온 것이죠. 이들은 416연대 내에서 활동하며 흠이 될 법한 발언이나 행동을 스파이처럼 훔쳐 듣고는 이를 보고서로 만들어 박근혜 정부 쪽에 보고해왔다고 합니다. 외부든 내부든 세월호 특조위를 흠집 내려는 정보 유출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죠.

 

출처 - 미디어오늘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공무원이 보수단체와 결탁해 특조위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해온 사실이 폭로되었다는 겁니다. 세월호 특조위에 파견된 해양수산부의 3급 공무원이 세월호 유족에 대한 고발과 특조위 해체 주장을 해온 보수단체와 결탁한 정황이 드러난 것인데요, 당시 해수부 공무원은 보수단체 대표에게 세월호 유가족 중 홍모 씨를 왜 고발하지 않느냐며 "다 조국을 위하는 일이니 홍씨를 재차 고발해 달라"고 사주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주로 인해 유족인 홍 씨는 대통령 명예훼손과 국가보안법으로 고소를 당했죠.

 

이는 일반 공무원 몇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인 특조위 활동 방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의 '최고 존엄'을 위해서는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엄마조차 빨갱이로 몰아 고소하기까지 했으니, 박근혜 정부는 무능할 뿐 아니라 사악하기조차 합니다.

 

출처 - 민중의 소리


결국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26일 광화문광장에서 해수부의 세월호 유가족 핍박 사주와 특조위 조사활동 방해에 대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사주한 해수부 공무원과 직원을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릅니다.

 

출처 - 뉴시스


같은 날 오후 한강에서 125톤 규모의 유람선이 운항 도중 가라앉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승객과 승무원 등 11명은 무사히 구조됐지만 영동대교 부근에 가라앉은 유람선은 아직 예인되지 못했고 침몰 원인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크고 작은 선박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젠 서울 한복판에서 유람선이 가라앉는 일마저 생겼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출처 - 다음 영화

 

얼마 전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의 1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를 본 관객수가 3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저희도 이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만, 사실 독립영화의 특성상 1만 관객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나쁜 나라》의 흥행은 경이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영화에 소개된 《나쁜 나라》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2014년 4월, 진도 앞바다에서 생중계된 세월호 침몰사건은 304명의 희생자가 속해 있는 가족들에게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안겨줬다. 그중에서도 단원고 학생들의 유가족들은 자식 잃은 슬픔을 가눌 틈도 없이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 앞에서 노숙 투쟁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질문은 단 하나,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 하지만 그 진실은 1년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평생 ‘유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마주친 국가의 민낯, 그리고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그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 1년의 기록.

 

지난 30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나쁜 나라》 상영회가 열렸습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이 노스욕 시청 대회의실을 빌려 무료 공동체 상영을 한 것이고 합니다. 해외에서 세 번째로 열린 상영회였는데, 250여 명의 관객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월호 진실 규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입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영화 상영 후 요크 대학교에서 온 현지 학생은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바로 조사를 들어가지 않았는지, 가족들이 어떻게 저렇게 해야 하는지 여기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지요.


세월호 인양은 7~9월로 예정돼 있는 데 반해 특조위의 활동기한은 6월까지입니다. 특별법 7조 1항에 따르면 위원회의 의결로 한 차례 활동기간을 6개월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나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체 얼마나 무능하길래, 혹은 대체 무엇이 밝혀지는 게 그렇게 두려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이렇게까지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걸까요?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비행이 펴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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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선진화법 vs.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꼼수

국회선진화법이 여야가 아닌 청와대와 여당 사이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경제살리기 법안 통과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국회를 압박한 것도, 서명운동이란 우스운 방법까지 동원한 이유도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가로막혔기 때문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얼마 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18대 국회 말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과정을 두고 많은 의원들이 반대했지만 당시 권력자가 찬성으로 돌아서자 반대하던 의원들도 찬성으로 돌아서 버렸다고 언급해 청와대가 부글부글하고 있습니다. '권력자'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대체 이딴 법 누가 만든 거야?" 하고 소리 지르며 박근혜 대통령을 뚫어지게 바라본 셈입니다. 국회선진화법 논란이 청와대와 여당 대표의 충돌 국면으로 들어간 형국이죠.


출처 - JTBC


식물국회 싫다고 동물국회로 회귀할 건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0일 국회선진화법에 대해 국회 기능을 원천 마비시키고 정치 후퇴를 불러온 희대의 망국법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여당은 현재 소수인 야당에 발목 잡혀 아무 법안도 처리할 수 없게 된 속칭 식물국회의 원흉을 국회선진화법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2012년에 도입한 법임에도 말이죠.

출처 – the300


국회선진화법이란 2012년 5월 2일자로 개정된 국회법의 별칭입니다. 국회선진화법은 기존 국회법에 의장의 직권상정 요건 강화, 폭력국회 방지 및 처벌, 안건 조정제도, 예산안 처리 강화, 본회의에서 무제한 토론 도입 등을 정하는 법 조항을 추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날치기 법안 통과와 의회 내 폭력사태 방지를 위한 개정이라고 할 수 있죠. 국회선진화법은 예의 있는 국회 진행과 소수당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법에 가깝습니다. 식물 국회가 싫다고 또다시 날치기 통과가 횡행하고 이 때문에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정글의 왕국 같은 동물국회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 않겠습니까?

출처 - 노컷뉴스


현재 여당인 새누리당은 국회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예전 같으면 날치기로 단독 통과시킬 수 있는 노동개혁이나 경제활성화 법안 등을 일일이 야당의 동의를 얻어야 하니 답답함을 느끼는 겁니다. 게다가 같은 당 출신인 정의화 국회의장마저 의장 직권 상정에 완강히 반대하며 법대로 하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니 샛길 또한 막힌 셈이죠. 현재 국회선진화법은 의장 직권상정 요건을 천재지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국회법 87조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려는 새누리당


하지만 국민에겐 무능하지만 자신들에겐 유능한 새누리당은 우회로를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지난 18일 새누리당은 본회의의 전 단계인 국회운영위원회를 열어 국회법 개정안을 상정한 후 바로 폐기했습니다. 이상하죠? 그렇게나 뜯어고치려던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개정안을 상정했다 왜 자기들 손으로 폐기한 걸까요? 이는 국회법 87조의 맹점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출처 - the300


국회법 87조는 "위원회에서 본회의에 부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된 의안은 본회의에 부의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이 본회의에 보고된 날로부터 폐회 또는 휴회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 이내에 의원 30인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새누리당은 조건을 충족하는 의원 30명을 미리 모아놓고 자기들 손으로 개정안을 상정했다 폐기합니다. 이후 폐기된 개정안을 30명이 본회의에 부의를 요구하는 겁니다. 이런 꼼수를 쓰면 야당의 반대를 뚫고 본회의에 법안을 상정할 수 있게 됩니다. 상정만 된다면 국회 과반을 새누리당이 차지하고 있으니 표결을 통해 법안 통과가 가능하겠죠. 국회선진화법이 있는 현재로써는 날치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죠. 법의 맹점을 이용해 법을 바꿀 개정안을 상정한다니 참 자기들 이익에는 도가 튼 사람들입니다.


야당은 3선 개헌하듯 날치기했다며 법 통과를 위해 법을 부결시킨 극단적 꼼수이자 의회 파괴 행위라고 맹비난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김무성 대표가 신년기자회견에서 정의화 의장을 향해 국회선진화법을 직권상정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으니까요. 이 모든 꼼수를 부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이었습니다.



정의화 국회의장 중재안 제안, 새누리당 개정안은 반대


우선 정의화 국회의장은 21일 국회에서 "현재 선진화법 위헌 소지의 가장 큰 부분은 의회민주주의 부분 과반수의 룰을 어긴 것이지 직권상정 엄격히 제한한 것을 위헌이라고 볼 수 없다"며 사실상 새누리당의 개정안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새누리당의 꼼수에 의해 본회의에 법안이 부의되더라도 국회의장이 상정하지 않으면 처리할 수 없으니까요. 이에 정의화 국회의장은 중재안을 제시합니다. 위원회 단계에서 여야 합의가 안 되면 정수의 60퍼센트 찬성으로 신속처리가 가능하게 한 룰이 선진화법 문제의 핵심이므로 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현재 330일인 안건신속처리제도의 심의 시한을 최대 75일로 단축하는 추가 중재안을 내놨죠. 2012년 국회법 개정 당시 국회선진화법을 반대한 사람이 지금은 이 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같은 모양새가 되다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출처 - the300


일단 새누리당은 정의화 의장의 중재안을 수용해 절충안을 찾아보겠다고 한 모양새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정의화 국회의장이 설득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야당은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국회가 국회답게 제대로 작동하고, 정치인이 정치인답게 행동하려면, 국회선진화법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다만 현실적으로 총선 전 선거구 획정을 위해서도 여야 간 신속한 사태 해결이 필요하긴 한 상황입니다. 과연 국회선진화법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요? 법 하나에 수많은 현실 문제가 얽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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