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보도

중국 눈치 보느라 권위가 땅에 떨어진 SF 휴고상

by 생각비행 2024. 2. 20.

문학 장르 중 SF는 'Science Fiction'의 약자로 과학적 사실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작가가 상상력을 가미해 쓰는 작품을 의미합니다. 과학소설 또는 SF소설이라고도 합니다. 나아가 이런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창작된 영화, 게임을 이르기도 하고, 원작 자체가 영화나 게임인 SF도 존재합니다. SF는 과학에 기반을 두는 만큼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세계와 미래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 상상력을 통해 인간성을 성찰하거나 현재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작품들처럼 말이죠. SF의 장르적 특성 때문에 현대 과학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SF의 문학사적 위상은 점점 드높아졌습니다. 상업적으로 SF영화 혹은 게임의 인기가 더 높을지 몰라도 원작인 문학 작품들이 없다면 이쪽 분야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출처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휴고상과 네뷸러상은 SF소설 중 그해의 최고 작품을 뽑아 시상하는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 휴고상은 1955년 미국 SF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휴고 건즈백을 기념하며 만들어진 상입니다. 70여 년에 이르는 전통을 자랑하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커트 보니것, 아서 C. 클라크, 어슐러 르 귄, 윌리엄 깁슨, 닐 게이먼 등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이 상의 수상자입니다. AI, 사이버펑크, 사이버스페이스 같은 개념이 이런 SF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각인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조만간 개봉할 대작 SF영화 <듄> 역시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데요,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 수상한 작품입니다. 영화로 치자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2024년 연초에 휴고상의 권위와 명예가 완전히 실추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작품 심사와 수상 작품 선정 과정에서 검열과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됐기 때문입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2월 15일 휴고상을 시상하는 세계SF대회(월드콘)의 운영위원회 측이 지난달 발표한 2023년 시상식 관련 데이터를 근거로 이와 같이 보도했습니다.

 

 

2023년 휴고상 시상식은 10월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개최됐습니다. 중국 작가가 상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휴고상 시상식이 중국에서 열린 건 처음이었죠. 그런데 심사 과정을 두고 여러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2023 휴고상 검열 리포트(FILE770.com) : https://file770.com/the-2023-hugo-awards-a-report-on-censorship-and-exclusion/ (영문)

우선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 RF 쾅이 특별한 이유 없이 최종 후보 명단에서 제외된 데 대해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운영위 측이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입니다. 이 의혹은 2023년 휴고상 심사위원단의 메일이 유출되면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출처 - documentcloud.org

 

휴고상 심사위원장이었던 데이브 맥카티는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시상식이 열리기 전 심사위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후보 작품이 중국, 대만, 티베트 또는 중국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추천해도 안전할지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압박했습니다.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심사위원이었던 다이앤 레이시는 다른 심사위원들에 보낸 성명에서 "우리는 중국, 대만, 티베트 문제 등 중국이 민감해하는 이슈를 다룬 작품을 면밀히 심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부끄럽게도 그렇게 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로써 휴고상 심사위원들이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 검열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검열 과정은 실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상 휴고상 운영위 측은 블랙리스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꼼꼼하게 작가들을 걸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상식이 중국에서 거행되기 때문인지 중국 정부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를 만한 여지가 있다면 죄다 후보에서 제외해버렸습니다.

 

출처 - 넷플릭스

 

<멋진 징조들>, <샌드맨> 등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끈 작품의 원작자인 닐 게이먼은 <샌드맨> 여섯 번째 에피소드로 후보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추천을 받았지만 최우수 드라마틱 프레젠테이션 후보에서 제외됐습니다. 닐 게이먼이 평소 중국 정부가 작가들을 구금하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수상 작품 선정 과정에서 의혹의 발단이 됐던 RF 쾅의 경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던 <양귀비 전쟁> 3부작의 주인공이 마오쩌둥을 연상케 한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레딧

 

중국계 캐나다인인 시란 제이 자오 역시 부당하게 후보에서 제외됐습니다. 그의 작품 <IRON WIDOW>가 측천무후 이야기를 SF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모조리 탈락시킨 겁이 현실입니다. 알래스데어 스튜어트 작가의 경우 대만에 있는 배트맨 테마 호텔에 가고 싶다고 언급했다는 이유로 휴고상 후보에서 제외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출처 - 트위터

 

세 번이나 휴고상 후보에 올라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 폴 와이머는 티베트에 간 적이 있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됐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폴 와이머는 티베트에 다녀온 적이 없다고 하죠. 그는 자신이 다녀온 곳은 티베트가 아니라 네팔이라며 SNS ID를 '네팔은 티베트가 아니다'로 바꿔 항의의 뜻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휴고상의 권위가 실추된 사건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과거에 정권의 눈치를 보며 국방부가 불온도서를 선정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자 정부가 인증한 불온도서라며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이런 일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20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9월 14일 부천국제만화축제 기간에 맞춰 개막할 예정이었던 제24회 전국 학생만화공모전 수상작 전시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카툰 부문 금상 수상작인 <윤석열차>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잡음이 빚어질 가능성이 커지자 아예 전시회를 취소했기 때문이었죠. 불통의 정치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출처 - 에스콰이어

 

휴고상 심사 사건으로 올해 수상작을 심사해야 할 2024년 월드콘 위원회 위원 일부는 사임했다고 하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비판하고, 새로운 미래상을 제시해오던 SF 장르의 권위 있는 상의 권위와 명예가 바로 회복되는 건 아니죠.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의 전통 있는 시상식이 중국 자본에 굴복했다는 사실이 씁쓸함으로 남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