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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제44회 장애인의 날, '장애인 차별 철폐' 요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by 생각비행 2024. 4. 23.

지난 주말 완연한 봄의 절정을 느끼려는 마음으로 외출하신 분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런 '외출'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장애인들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지난 4월 20일은 제44회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조차 장애인들의 이동권은 찬밥 신세였습니다. 하루 전인 19일부터 1박 2일의 단체 행동을 진행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등의 장애인 단체 활동가 4명이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서울 혜화경찰서는 전장연의 이규식 공동대표와 활동가 한 명을 특수재물손괴와 폭행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했습니다. 혜화역에서 승강기 문을 고장내고 서울교통공사 직원의 머리카락을 잡았다는 혐의였습니다. 승강기 문에 부딪혀 고장을 낸 건 실수였고 직원의 머리카락을 잡은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들의 항변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성북경찰서는 집시법 위반과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전장연 활동가 2명을 현장에서 체포했습니다. 한성대입구역 인근 횡단보도에서 경찰이 앞을 가로막자 휠체어로 경찰 방패를 밀어냈다는 혐의였습니다. 경찰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위 자체를 막아서는 바람에 길을 건너려고 항의했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연행됐다고 하죠.

 

출처 - JTBC

 

이런 뉴스를 볼 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애인들이 집에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괜히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장애인들이 과도하게 이동권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볼 일이 아닙니다.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이유를 우리 사회가 귀담아 들었더라면, 그들이 과연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전장연을 비롯한 장애인 단체들은 시혜적이고 일회성인 '장애인의 날' 행사를 거부한다는 취지로 22년 전인 2002년부터 이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노동, 인권 관련 사회단체와 더불어 공동투쟁단을 꾸려 연대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출처 - 한국일보

 

왜 이들은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시위를 펼쳤던 걸까요? 2번 출구를 나서서 바닥을 살피면 '장애인 이동권 요구현장' 동판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9년 6월 28일, 혜화역 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 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인 이규식 씨는 노들야학 학생 시절이던 1999년 6월, 혜화역에 갔다가 장애인용 리프트에서 추락사고를 당한 뒤로 이동권 운동에 매진하는 활동가로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은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투쟁의 현장으로 뜻깊은 장소죠. 

출처 – 연합뉴스

 

올해는 장애인들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죽은 듯 드러누워 항의하는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펼쳤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슬로건처럼 '장애인도 시민으로 살고 싶습니다.'였습니다. 이들은 장애인권리보장법,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장애인평생교육법, 중증장애인노동권 보정특별법을 제정해달라며 각 정당 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올해 전액 삭감한 중증장애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의 예산 복원, 해고당한 장애인 노동자 400명에 대한 권리도 주장했습니다.

 

출처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무차별 연행'뿐이었습니다. 혜화역에 수많은 경찰이 모여 장애인들을 끌어냈습니다. SNS에 퍼진 여러 글에 의하면 혜화역 출구마다 장애인이 아닌 것을 확인한 뒤 역으로 입장하게 하는 차별 행위가 벌어져 시위와 상관없는 시민들조차 기분이 나빴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경찰력을 10.29 참사 때 동원했더라면 안타까운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테죠.

 

출처 - 디미토리

 

이날 스크린도어 고장으로 연착되는 열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역내 방송을 통해 전장연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연착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들었다며 관련 증언을 익명 정보 커뮤니티 서비스인 디미토리에 올렸습니다. 익명의 사용자들은 "지하철에서 시위 때문에 연착된다는 공지 믿지마", "지하철 타는 장애인이 그렇게 미워서 공기업이 시민 상대로 사기를 치는데 이건 넘어가도 됨? 저는 이거야말로 진짜 사기행각이고 시민 신뢰를 저해하는 행위라고 봅니다", "이상한 내용이 보이면 다들 재깍재깍 문자로 정정해 주시라... 고의면 심각한 악의인 데다 장기적인 장애인 인권을 위해서라도 절대 넘겨서는 안 되는 문제라 생각이 듦..."이라며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을 욕받이로 쓰고 있는 문제점을 성토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제44회 장애인의 날이던 지난 4월 20일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국가인권위원장 등 장애인들이 면담을 요구했던 이른바 '높으신 분들'은 근엄한 원론만 되풀이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예산을 삭감해 장애인들에게 깊은 실망을 안겼다는 논평을 냈고, 국민의힘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장애인들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적극 참여, 활동할 환경이 조성돼야 마땅하다고 논평을 냈습니다. 국가인권위원장은 장애인 탈시설의 국제적 흐름에 지역사회가 발맞춰 나가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장애인들의 형편을 끌어다 쓰기 바쁜 모양새입니다. 장애인의 삶을 바꿀 힘이 있는 이들이 장애인들의 형편을 되레 자기네 필요를 위해 끌어다 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출처 - MBC

 

킴 닐슨이 쓴 《장애의 역사》를 번역한 김승섭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차별은 공기와 같아 기득권에게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지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차별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책의 저자 킴 닐슨은 "민주주의의 본래 모습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는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또 보살핌을 받는다. 납세자, 공교육을 받는 학생, 부모의 자식, 공공 도로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 공적 자금이 들어간 의학연구의 수혜자, 삶의 다양한 순간에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경우에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한다. 우리는 상호의존(Interdependent)하는 존재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해석노동》을 쓴 양정호 작가는 해석노동을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판단하려는 습성이자 나를 타자에게 대상화하여 스스로 타자에게 종속시키려는 성향이 습성화된 심리노동"으로 규정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박경석 전장연 공동대표는 이동권 시위를 하며 자신들의 시위가 초래한 불편함 때문에 장애인들에게 백 번 욕할 때 단 한 번이라도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욕해달라고 했다. 약속 후 20년이 넘도록 장애인의 이동권을 홀대한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해 봐달라는 뜻이다.
지난 약속을 이행하지도 않고서 선거철에만 장애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제시하는 정치꾼과 정부에 돌아가야 할 손가락질이 엉뚱하게도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향하고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똑같은 시민이다.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따로 있건만, 우리는 책임자들의 입장에 서서 우리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제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장애인 관련 이슈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문제에서 약자가 약자를 비방하고 손가락질하는 일이 만연하다면 그 사회는 '해석노동'에 길든 사회라 할 수 있다.

'해석노동'의 문제는 그것을 수행하는 당사자가 해석노동의 수혜자인 상급자를 비판하는 대신 자신보다 약한 동료나 하급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불합리한 행태를 그대로 전수한다는 것입니다. 숱한 산업재해를 은폐하고, 조직 내 성적 괴롭힘을 못 본 척하고, 윗사람으로부터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받았을 때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석노동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은 타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고, 그들이 받는 차별은 우리에게 돌아올 차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출처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우리는 전장연의 이동권 요구 시위를 욕하기보다 그들이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하루 빨리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장애인들이 "경찰은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을 '장애인 불법 연행의 날'로 만들지 마라!"는 구호를 경찰서 앞에서 외쳐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인식의 변화, 제도의 변화를 함께 고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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