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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전세 대란' 시대에 살펴보는 전세의 과거와 미래

by 생각비행 2015. 3. 10.

“아버지는 큰오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방은 전세인가, 사글세인가? 방세는 한 달에 얼마인가?”


신경숙 작가의 1995년 작품 《외딴방》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경숙 작가는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 번역판이 출간 직후 매진되는 등 외국에서 큰 호평을 받으며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올해는 《외딴방》의 영문판으로 미국 시장을 다시 한 번 두드릴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최근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전세 대란'과 맞물려 앞서 소개한 작품 속 대화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전세'를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할까요? 사글세는요?


 

출처 - 한국일보


전세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주택임대 제도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방대한 인터넷 백과사전 사이트인 위키피디아 항목에 '전세'를 영문으로 'Jeonse', 일본어로 'チョンセ'라고 우리말 발음 그대로 표기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뿐 아니라 한국을 무대로 한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에 쓰인 "네가 여기 전세 냈느냐?"는 표현도 한국 문화에 익숙한 외국인이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외국인들은 전세가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와 같은 개념으로 막연히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실상 우리에겐 현실이고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중요한 경제지표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전세'가 서민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혹독한 현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전세가가 매매가를 뛰어넘었을 정도로 주택 시장의 혼란이 심각합니다. 이러한 때에 과연 '전세'라는 개념이 어떤 유래를 거쳐 우리 사회에 정착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이런 궁금증을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관습으로 유지되다 일제강점기에 법적으로 확립


전세는 우리나라에서 고유하게 발달한 관습상의 부동산, 특히 건물 대차 제도로서 그 기원이 명확하지는 않다고 하는군요. 학계에서는 논밭을 담보로 돈을 융통하던 조선 시대 전당(典當)제도가 전세제도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전당제도가 가옥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전세를 법적인 제도로 인정하기 시작한 때는 일제강점기부터라고 합니다. 광복 후 미 군정이 들어선 1949년에 그간 관습으로 성행하던 전세권이 민법제정으로 물권으로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군정 법률 자문관이던 찰스 로빈기어(C. Lobingier)가 한국민법전초안(韓國民法典草案)에서 전세제도를 서구의 모기지(mortgage)와 유사한 제도로 인식해 이를 법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관습조사보고서. 대구광역시립중앙도서관 소장 / 출처 - 경향신문


2015년 3월 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조선시대에도 '전세난민' 있었다>라는 기사를 보니 전세에 관한 가장 빠른 공식 자료는 1910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관습조사보고서>라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전세란 조선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가옥 임대차 방법이며, 차주가 가옥 가격의 반액 내지 7~8할을 소유자에게 기탁하면 별도의 차임을 지불하지 않고 반환 시 기탁금을 돌려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로 이동하는 농촌 인구와 이주 일본인이 급증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주택 수요가 늘어나 전세가 확대되었습니다. 광복 이전까지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에서 주로 전세가 사용되었다고 하는군요. 일제강점기에 전세 기간은 도시에서 보통 1년, 수요가 많은 서울은 100일 정도로 지금과 비교하면 무척 짧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세제도가 유지된 이유


"굳이 집을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전세라는 좋은 제도가 있는데...(웃음) 근데 전세값도 많이 오르고, 살면서 고장 나는 게 있으면 주인에게 고쳐달라고 해야 하고…. 전세 만기일이 되면 자꾸 집을 보러 오시는데 그때마다 집을 비워드려야 하니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 집을 사게 됐죠."


2011년 1월《우먼센스》 인터뷰 기사에서 대표적인 한류 스타로 등극한 배우 배용준조차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전세는 세입자에게 유리한 측면이 많은 주택임대 제도입니다. 별도의 월세 지출 없이 애초 지급한 전세금은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고스란히 돌려받게 되니까요.

 

집주인으로서는 별도의 이자 부담 없이 목돈을 쥐긴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면 돌려줘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은 세입자와 집주인 양쪽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세입자 입장에선 대체 뭘 믿고 몇천, 몇억에 달하는 큰돈을 집주인에게 맡기는지 의아해하고, 집주인 입장에선 집값보다 낮은 전세금만 받고 별도의 월세를 받지 않는 채 집의 전권을 세입자에게 내어주는 전세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우리 사회에 좀 적응한 외국인이라면 전세를 십분 활용하는 편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전세제도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땅과 집에 집착하는 한국인의 특성과 고도성장기가 겹쳤기 때문일 겁니다.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늘고, 특히 수도권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주택 수요는 해마다 계속 늘어났습니다.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은행 금리도 높은 수준이 유지되는, 보통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집주인 입장에서는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 분명하니 당장 팔기보다는 임대하면서 가격이 더 뛰길 기다리는 편이 이득이었고, 은행 이자도 높으니 전세금 같은 목돈을 예치해두면 평균적으로 월세보다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한없이 계속될 리는 없죠. '전세 대란'이 최근 들어 대두한 사회적 문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 사실 고도성장기에도 전세 대란은 줄곧 있었습니다.

 

적정선을 훨씬 뛰어넘은 높은 전세가격 상승은 주택가격을 올리는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을 이사철에 접어들면서 오르기 시작한 전세가격은 물건이 달리면서 더욱 뛰어 서울 잠실지역주택공사 아파트 7.5평형의 경우 전세 가격이 550만~600만원으로 주택가격 660만~700만원의 85%선까지 올랐다.

 

언뜻보면 마치 최근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는 무려 33년 전인 1982년 10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의 내용입니다. 역세권 건물주들이 전세를 사글세로 돌리고 월세를 올리는 등 집 가진 자의 힘 행사와 집 없는 자가 설움을 겪는 사황은 수십 년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출처 - 세계일보


 

전세,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초저금리 시대에 돌입한 우리나라는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어 있어 전세금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습니다. 집주인 입장에선 집값이 하락하니 목돈인 전세금으로 다른 건물을 매입하기 꺼려지는 측면이 있고, 금리가 바닥을 치다보니 전세금에 의한 이자보다는 안정적인 월세를 챙리려고 합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집값이 더 떨어질 것이 예상되니 당장 집을 사기보다는 원금을 보존할 수 있는 전세를 더 찾게 됩니다. 한마디로 전세에 대한 공급과 수요가 완전히 역전되어 지금 같은 전세 대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빚어지는 겁니다. 

 

출처 - 경향신문

 

특히 올 3월 들어 서울 아파트 전세값은 사상 최대 폭으로 폭등했습니다. 이 때문에 전세 대란에 시달리던 서민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집을 구매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파트를 포기하고 급등한 전세값으로 살 수 있는 연립 다세대, 단독 주택 매입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군요.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활성화라는 자화자찬과 달리 서민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집을 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집을 가진 쪽이나 집을 구하는 쪽이나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출처 - 세계일보


인구가 줄고 있으니 집값이 예전처럼 오르기를 기대하기 어렵고, 금리 역시 오르기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특유의 전세 방식은 자연스레 월세 방식으로 바뀌게 될 전망입니다. 이런 혼란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세 대책과 더욱 근본적인 부동산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사실상 박근혜 정부는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들은 현재의 전세 대란을 어떤 역사적 사실로 마주하게 될까요? 《외딴방》을 읽을 미국 독자들처럼 전세라는 제도를 낯선 제도로 이해하게 될 시절이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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