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넘으며 〈터미네이터〉 신작을 누르고 2주 연속 예매 순위 1위를 기록했습니다. 7일이 지난 현재 141만여 명의 관객이 들었죠. 동명의 원작 소설 역시 120만 부 넘게 판매됐습니다. 80쇄를 넘어 곧 100쇄를 찍은 도서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1982년에 태어나 2019년의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 김지영이 삶에 겪는 차별과 불평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 아닌가 합니다. 책과 영화를 둘러싼 논란 역시 많았지만 그만큼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라는 뜻이겠죠.


출처 - 영화진흥위원회


생각비행은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둘러싼 논쟁을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 82년생 김지영 영화화로 더 선명해진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 : https://ideas0419.com/877) 1년 전 영화화 소식이 전해진 날부터 마치 미래에서 영화를 보고 오기라도 한 듯 영화 사이트마다 평점테러를 날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개봉을 앞두고 이런 움직임은 극에 달했습니다. 개봉도 하기 전에 일부 남성들을 중심으로 각 영화 사이트에 가장 낮은 점수를 주는 이른바 평점테러가 발생했고, 이에 반발한 일부 여성들이 만점을 주는 바람에 영화가 화제가 되는 한편 큰 혼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한 영화 평점 사이트에서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도 되기 전에 최저점과 최고점밖에 없는 별점 분포가 유출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개봉한 뒤 직접 영화를 본 관객들만 매길 수 있는 평점은 대부분 좋은 별점이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 〈82년생 김지영〉이 얼마나 작품 외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시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왓챠

출처 – 네이버 영화


《82년생 김지영》 책이 수많은 여성의 공감을 받으며 미투운동과 더불어 대한민국 페미니즘 이슈를 견인하는 하나의 사회문화적 아이콘이 되었기 때문인지 인터넷이나 SNS에서 심각한 악플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레드벨벳이나 소녀시대 등 인기 연예인 중에 책을 감명 깊게 봤다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다니며 댓글테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똑같이 인상 깊게 봤다는 글을 올린 방탄소년단의 RM에게는 다른 여성 연예인들에 비해 악플이 현저하게 적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페미니즘 이슈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악플과 평점 테러를 하며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82년생 김지영〉 영화 개봉 전부터 똑같이 하고 다닌 것만 봐도 그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읽거나 보지도 않은 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운 매체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내용상 굉장히 온건한 편에 속합니다. 21세기 사회에서 이 정도 메시지조차 받아들이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얘긴지 의아할 정도로 말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차별과 혐오가 참으로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이슈는 페미니즘에 공감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졌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해프닝이 아니었나 합니다.


출처 - 뉴시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벡델 테스트'라는 걸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국 여성 만화가인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지표인데, 작품 내에서 균형적 성별 묘사를 위한 최소한의 요소가 영화에 반영돼 있는지를 보는 데 중점을 두는 방식입니다.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하고, 그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여성 캐릭터의 대화 주제가 남성 캐릭터와 관련이 없어야 한다’는 간단한 조건인데, 의외로 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영화가 많지 않았습니다.


출처 - 카이스트


우리나라 영화 연구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 왜 더 많이 나올 수 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난 14일 카이스트 이병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국내외 영화를 막론하고 여성을 편향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슬픔, 공포, 놀람 등 수동적인 감정은 여성 배역에 더 표현되어 있는 반면, 분노, 싫음 등 능동적인 감정 표현은 남성 배역에 더 몰려 있다는 겁니다. 여성이 자동차와 함께 나오는 비율은 남성의 절반 수준인 55.7%인데 비해 가구와 함께 나오는 비율은 무려 123.9%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영화 전체에 대한 시간적 점유도에서도 여성은 남성보다 56% 낮았습니다. 여성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간이 남성의 절반도 채 안 된다는 거죠. 평균 연령은 79.1% 정도로 여성이 더 어리게 나왔습니다. 남녀 역할이 고정되어 있고 여전히 영화계 전체가 거의 절대적으로 남성 위주로 이뤄져 있다는 결과입니다. 이병주 교수는 영화라는 매체가 대중 잠재의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며 영화 내 남녀 캐릭터 묘사를 더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 SBS


원작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중국 최대 규모 온라인 서점 당당에서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초판 4만 부가 금새 동나 2만 5000부를 증쇄해 이미 6만 5000부 판매고를 넘겼죠. 이보다 먼저 나온 일본어판 역시 14만 부를 돌파한 상황입니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전 세계적으로 더는 막을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더 피하려 하지 말고 우리 곁에 있는 여성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보시면 어떨까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4.19 혁명 기념일인 지난 4월 19일 CGV 압구정에서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의 시네마톡 행사가 있었습니다. 시네마톡은 영화평론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이동진 평론가가 진행했습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에 앞서 생각비행이 출간한 원작 그래픽노블인 《스탈린의 죽음》을 인상 깊게 보셨기 때문인지 방대한 정보와 역사적 사실을 영화적인 시선과 엮어 알찬 시간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생각비행도 시네마톡에 참여했습니다. 못 오신 분들을 위해 시네마톡 행사의 내용을 정리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원작 그래픽노블 《스탈린의 죽음》과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시네마톡을 시작하며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재밌기도 하고 뒤로 가면 서늘해지기도 하는 작품이라고 정리했습니다. 단상 위를 보시면 온통 새빨간 책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원작 그래픽노블 《스탈린의 죽음》입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그래픽노블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읽기 쉬운 만화로 보면 좋을 것 같다며 내용이 참 좋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이 책들은 시네마톡이 끝나고 이동진 평론가의 추첨으로 관객분들께 증정되었습니다. 배급사 측의 요청으로 생각비행이 협찬한 책인데요, 부디 받으신 분들이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후로는 이동진 평론가의 시네마톡 내용을 정리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스탈린이 죽었다!〉란 영화는 보셨다시피 소련의 현대 정치사가 담겨 있는 영화이지만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그런 부분은 없으셨을 거예요. 캐릭터들의 이름이 좀 어렵다는 느낌 정도는 있을 거 같은데요, 기본적으로 굉장히 잘 만든 위트 있고 지적인 블랙코미디, 정치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체의 4분의 3까지는 일종의 해프닝 코미디처럼 진행되다가 마지막이 굉장히 서늘하게 끝나는 능숙하고 멋진 잘 만든 영화입니다.


최근에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다 보면 순간적인 맥락을 거세하고 그야말로 보편타당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틀을 제공하는 시간과 공간의 특성 같은 게 있을 겁니다. 얼마 전에 〈바이스〉 같은 영화도 그렇고 곧 개봉할 〈서스페리아〉 같은 영화도 당대의 정치 사회적인 맥락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르고 보셔도 되겠지만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치적인 소재와 스탈린의 죽음을 다루는 영화인 만큼 그런 부분이 더 중요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영화에서 보여준 이야기 그리고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저도 이름을 처음 들었습니다. 이름도 어렵고(아만도 이아누치) 영화를 두 편 정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영화가 두 번째 영화예요. 감독은 〈스탈린이 죽었다!〉로 굉장히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TV에서 정치코미디를 굉장히 능숙하게 만들어 잘 알려진 감독이라고 하는데, 이런 정도의 연출력이라면 다음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일 기뻤던 건 스티브 부세미를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코엔 형제 영화 중에 최고작이 무엇이냐를 놓고 팬들끼리 의견이 갈리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파고〉를 꼽습니다. 영화 안에서 스티브 부세미의 얼굴을 가지고 농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말 이상하게 생겼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1990년대에 스티브 부세미는 코엔 형제 영화나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같은 영화를 통해 굉장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외모가 인상적이라 한번 보면 몽타주가 잊히지 않는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 스티브 부세미를 오랜만에 봐서 한 명의 관객으로서 좋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너무 늙으셔서 마음이 좀 아프기도 했지만요.




다른 배우들도 이 영화에서 연기 앙상블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연하게도 아까 언급한 〈바이스〉와 이 〈스탈린이 죽었다!〉가 올해 들어 본 최고의 연기 앙상블을 보인 영화가 아닌가 합니다. 〈바이스〉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스타 배우들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반면 이 영화의 배우들은 그렇게까지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배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출신지나 연기 방식이 서로 다른 배우들이라는 거예요. 영화를 보다 보면 느끼시겠지만, 아마도 리허설을 굉장히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배우들의 합이 굉장히 잘 짜인 케이스가 아닌가 싶네요.


스티브 부세미야 오랜 세월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해온 대배우라고 말할 수 있죠. 반면 여러분도 비슷하게 느끼셨겠지만,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감탄한 배우는 처음 본 사이먼 러셀 빌이라는 배우, 그러니까 베리야 역의 배우였어요.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세익스피어 극단에서 세익스피어 극을 전문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고 해요. 이런 연극 배우와 스티브 부세미처럼 할리우드에서 영화 연기를 하던 사람은 연기 스타일이나 방식에 차이가 있거든요.



그런데도 두 사람의 연기 합이 굉장히 잘 맞아 보이죠. 어떤 영화를 보면 연기를 잘하는데 상대역의 기운을 뺏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배우가 있습니다. 누구라고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국내에서 연기를 잘한다는 최고의 배우를 꼽으면 대여섯 명쯤 되잖아요? 그중 어떤 배우는 상대 배우들이 싫어합니다. 상대 배역을 잡아먹는 방식으로 연기를 잘하는 케이스거든요. 반대로 어떤 배우는 상대 배우들이 좋아합니다. 상대 배역을 살리는 방식으로 자기도 연기를 잘하는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보통 연기를 잘하는 사람 한 명에게만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에 이런 게 잘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연기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은 앙상블이 좋아야 하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후자의 의미로 정말 훌륭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제프리 탬버라는 배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말렌코프 역을 맡은 배우죠.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세익스피어의 정극 연기를 하는 배우도 있고, 코미디언도 있고, 영화배우들도 있는데 그 조율에 있어서 감탄이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이 영화는 러시아에서 공개되지 못했습니다. 원래 러시아에서 상영 예정이었고 배급도 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문화국에서 영화 배급을 개봉 당일 취소해버렸다고 합니다. 큰 규모는 아니었겠지만 이미 상영하려고 배급까지 다 된 영화였지만, 러시아의 역사와 인민을 모욕하고 있다는 판결이 내려져 금지했는데 일부 극장에서는 공문을 못 받았다는 이유를 대며 상영을 강행하기도 했다고 하죠. 그래서 문화적인 스캔들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문화국이 상영을 강행한 극장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고 하니 문화사적으로 이슈가 있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 만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결정을 했다는 게 느껴집니다. 일단 언어의 문제가 있을 겁니다. 영화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 2~3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영화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해야겠죠. 이럴 경우 러시아 배우들, 예를 들면 이 영화에서 마리아 역을 맡은 올가 쿠릴렌코는 우크라이나 출신 배우인데요, 이런 배우들 위주로 캐스팅하거나 러시아어를 교육한 다음 찍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굉장한 사실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포기해야 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 보여주는 리얼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벌어진 얘기인데 모두가 영어를 쓰고 있으니까요.

 

또한 감독의 선택으로 보이는데, 영어를 쓰는 배우들끼리도 말투가 다 다르다는 걸 느끼셨을 겁니다.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 세련된 말투, 사투리 같은 말투 등 같은 영어라도 혼용되어 쓰이고 있죠. 아마도 영화적으로 그런 느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오히려 배우들이 자기 출신지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함으로서 얻어지는 연기 앙상블과 자연스러움을 얻었다고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배경인 러시아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분명 없지는 않을 겁니다. 딱히 왜곡이 아니더라도요. 대신 국제 영화 시장에서 영어 대사를 쓰는 영화이기에 얻어지는 장점들도 있겠죠.


진지할수록 웃긴 블랙코미디 스탈린의 죽음》(생각비행 네이버 포스트)


이 영화를 얘기할 때 원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사실 이 원작 그래픽노블을 먼저 봤거든요.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 요즘 유럽 쪽 특히 프랑스 그래픽노블이 많이 출판되고 있어요. 고급스럽고 판형도 크고요. 이런 작품으로 만든 가장 유명한 영화가 바로 〈설국열차〉입니다. 프랑스 그래픽노블 원작으로 봉준호 감독이 만들었죠. 〈스탈린이 죽었다!〉의 원작 그래픽노블인 《스탈린의 죽음》은 영화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신랄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영화 쪽이 훨씬 유머러스하죠. 영화는 유머 요소를 많이 넣어 장르도 코미디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원작은 단순히 코미디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베리야라는 사람은 변태 중에서도 상변태였어요. 소아성애자이며 수많은 강간을 저지른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영화는 최대한 순화해서 묘사했어요. 암시 정도만 주거나 대사로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넘어가고 있죠. 하지만 원작은 그런 면까지 부분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보시면 약간은 부담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기도 할 것 같습니다.


영화가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고 원작과도 다른 가장 다른 결정적인 부분은 베리야의 처형 시점입니다. 영화에서는 스탈린의 장례식날 바로 처형을 하죠. 장례식이 스탈린이 쓰러진 후 4일 만에 있었으니 영화는 4~5일 만에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원작을 보면 베리야는 3달 뒤에 체포되어 처형됩니다. 그게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요. 아마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인간군상을 밀도 있게 집어넣다 보니 원작을 다소 각색한 것 같습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영화 속에서 스탈린의 아들인 바실리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회자되는 아이스하키팀 비행기 사고는 스탈린이 죽기 3년 전인 1950년의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역사와는 어긋나지만 이를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엮어서 아들인 바실리의 캐릭터 드러내는 데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유디나는 실제로 스탈린을 꾸짖는 편지를 썼습니다. 굉장히 용감한 사람이죠. 그런데 스탈린에게 전달이 되지는 않았다고 해요. 스탈린은 그 난리 끝에 만들어진 연주 녹음 레코드만 들었다고 하고, 심지어 그 레코드를 듣고 연주에 감탄한 나머지 마리아 유디나에게 상금을 내렸다고 하죠. 스탈린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다른 이유로 쓰러졌다는 게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원작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합쳐서 활용했고, 영화 역시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잘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놀랍게도 원작과 영화에 등장하는 개개의 이야기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입니다. 단지 마리아 유디나의 경우처럼 개별 사건을 하나로 합치거나 바실리의 비행기 사고처럼 시점을 조정하거나 했을 뿐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책 분야 중 전기를 좋아합니다. 일부러 갖고 왔는데 스탈린 전기입니다.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 이 전기 뒤쪽 4분의 1이 영화와 겹칩니다. 원작과 영화에 등장한 주요인물 중 허구의 인물은 한 명도 없고 사건도 다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영화적으로 해프닝 코미디로 만드느라 나아간 부분이 있다는 게 다를 뿐 기본적으론 다 있었던 일이란 게 놀라운 부분이죠. 아마 감독이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각색의 방향을 블랙코미디로 잡은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코미디에는 두 종류가 있잖아요? 연기로나 극중 배우들이 이게 너무 웃기거든, 죽이거든 하는 듯한 연기가 있죠. 대표적으로 천만영화인 〈극한직업〉이 있습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스타일로 웃기는 연기의 방식이 있다는 얘깁니다. 이와 반대로 극중 인물이나 상황, 배우가 코미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맥락 속에서 웃을 수밖에 없는 코미디 연기가 있습니다. 〈스탈린이 죽었다!〉는 후자입니다. 이 영화의 유머가 인상에 남는 이유는 극중의 유머가 공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영화의 4분의 3 지점까지는 정말 웃긴 부분이 많잖아요? 왜 웃긴가 생각해보면 극중 인물들이 공포에 질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웃음은 관객인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스타일의 웃음인 거죠. 등장인물들이 웃긴 짓을 하고 어릿광대 같이 구는 건 스탈린의 독재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한 행동을 하다 보니 웃긴 거죠. 그런 상황 속에서 스탈린의 죽음으로 거대한 권력의 진공 상태가 생기게 되었고 여태까지 주체적으로 자기 말을 자기 입으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게 인민이든 권력자들이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죠. 그 모습에서 보이는 코미디가 이 영화의 주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한 편의 웃긴 해프닝 코미디이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함을 주는 코미디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스티브 부세미가 연기를 참 잘했는데 몰로토프와 함께 그의 부인인 폴리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폴리나가 인민의 배신자라며 비난하다 예상치 못하게 풀려나온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을 급 바꿔서 폴리나를 두둔하는 말을 하죠. 연기도 좋지만 이 뒤틀린 상황에서 오는 유머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머의 리듬도 잘 살린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스탈린의 아들인 바실리가 나오는 부분이었어요. 실제로 바실리는 개망나니였어요. 그가 아버지인 스탈린의 죽음을 처음 보고 총을 들고 난동을 부리잖아요? 그러다가 총을 뺏기자 앞에선 다른 장교의 총을 빼앗으려고 승강이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죠. 그 앞에 선 다른 사람들은 헛기침을 하거나 못 본 척을 합니다. 이 장면을 일반 영화처럼 짧게 편집하고 넘어갔으면 안 웃겼을 거예요. 그런데 이 장면을 상당한 롱테이크로 잡아요. 관객이 불편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말이죠. 이 정도 잡았으면 관객도 이제 이 컷이 넘어가야 된다 싶은 감각이 있는데요, 그걸 훨씬 넘어설 정도로 길어요. 장면 속 인물들의 분위기가 어색한데 편집의 어색함을 불편할 정도로 충분히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에 더 웃기게 됩니다. 이런 게 연출가가 만들어낸 유머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소련 체제는 굉장히 위선적입니다. 회의를 하면 만장일치여야 되는 거예요. 만장일치가 있기 어려운 의제에 관해서도 만장일치를 요구하죠. 영화 속에서도 만장일치를 위해 강압이나 이합집산 또는 쿠데타가 작용합니다. 극중 몰로토프가 장례식을 앞둔 위원회에서 스탈린의 유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을 4~5번 꼬면서 어떤 게 진짜 스탈린의 뜻이란 건지 주변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듯한 말투죠. 말을 꼴 때마다 위원회 사람들은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줏대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소련 역사에 대해 좀 설명을 드리자면 몰로토프는 스탈린 이후에 서기장이 될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람이었어요. 2인자였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의심가였고 2인자를 허용치 않았어요. 몰로토프는 스탈린과 함께 혁명 동지였고 실제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키워줬습니다. 하지만 몰로토프가 지나치게 커져서 의심이 발동한 스탈린은 자신이 키운 그가 2인자가 되자 이제는 밟기 시작합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모욕을 한다던지 몰로토프가 스탈린을 칭찬하는 연설을 한 직후에 단상에 올라 그 몰로토프를 비난하고 짓밟는 연설을 하기도 하죠. 이를 통해 사실상 몰로토프가 제거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공산주의에도 여러 방식이 있는데 트로츠키주의가 있을 수 있고 스탈린주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에 패배한 거죠. 스탈린주의는 1920~1950년대까지 소련을 지배한 이념이었습니다. 스탈린주의라는 냉혹하고 폭력적인 공산주의에 가장 큰 이해자이자 열렬한 지지자가 바로 몰로토프였어요. 몰로토프는 스탈린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극중 몰로토프가 무슨 말만 들으면 스탈린은 분파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둥 스탈린이라면 어렇게 생각했을 거라는 둥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철두철미한 스탈린주의자여서 그렇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영화의 장면을 보면 웃기기도 하지만 실상 몰로토프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 거죠. 스탈린 사후 스탈린주의에 대해 가장 충직하고 권위 있는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요. 그러니까 위원회 사람들도 권력의 크기 여부를 떠나서 공적 장소에선 그 한마디 한마디에 손을 내렸다 올렸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거고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결과 더 웃긴 장면들을 길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이 영화는 굉장히 폭력적인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만들면 폭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공포영화에서, 액션영화에서, 역사영화에서 폭력을 처리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스탈린이 죽었다!〉는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사실상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스탈린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좋은 부분도 있었고 평가할 부분도 있었지만 다만 역사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을 뿐이야'라고 좋게 말하지 않아요. 스탈린은 역사의 죄인이고 나쁜 놈이고 독재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베리야도 당연히 그렇고요. 그 밖의 인물들도 희화화되어 그렇지 좋은 사람들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영화 후반에 흐루쇼프가 보이는 냉혹함을 놓고 보면 영화는 흐루쇼프 편을 들지도 않습니다. 상층부 인물들 중 굳이 꼽자면 그나마 마음을 조금 주는 사람은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 정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등장하는 인물들을 희화화하고 조롱하고 무엇보다 꾸짖는 영화입니다. 과연 그런 영화 속에서 폭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면은 중요하죠.


 

감독은 원칙을 세운 것 같아요. 영화는 굳이 안 보여줘도 되는 스탈린의 사후 머리 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메스로 머리 거죽을 벗기고 톱으로 두개골을 써는 장면을 집어넣죠. 역사적으로도 부검이 있긴 했지만 스탈린이기 때문에 일부러 더 이렇게 다룬 겁니다. 베리야가 처형되는 장면도 마찬가집니다. 이 장면은 영화의 표현이 더 심합니다. 다른 장면들은 원작 그래픽노블의 표현이 더 심한데 베리야의 처형만은 영화 쪽이 더 심합니다. 역사적으로 베리야가 처형된 건 사실이지만 어찌됐건 형식적으로라도 군사재판은 받았고 정식 절차를 밟아서 처형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걸 한바탕의 혼란으로 묘사하고 그 난장판 속에서 비참하게 죽게 합니다. 시체가 된 뒤에는 불까지 지르지 않습니까? 이 장면은 감독이 이 인물을 상대로 일부러 강한 폭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원칙이 있다고 느껴져요.



다만 폭력 묘사에서 유일하게 한 장면이 조금 걸리는데요. 폭력으로 코미디를 드러낼 때는 불편함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무서운 영화〉나 〈이블데드〉 같은 영화는 폭력으로 코미디를 드러낼 수 있겠죠. 칼에 막 찔려 죽는데 웃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건 별로 불편한 웃음은 아니죠. 시체를 훼손하긴 하지만 영화 속의 맥락상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성을 건드린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어떻게 다루었나라는 점이에요. 물론 감독에게는 이걸 조심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론 웃겨야 된다는 원칙이 있었을 겁니다. 이 줄타기를 굉장히 잘했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조금 삐끗하지 않았나 싶군요.

 

예를 들어 위원회에서 말렌코프가 서기장에 오르고 갇힌 사람들의 석방을 결정하고 수용소에 공문이 도착하는데 "스탈린 만세!"라며 처형하는 중 이제 말렌코프가 서기장이 됐으니 "말렌코프 만세!라고 해야지"라며 석방 공문이 도착했는데도 굳이 수용자를 쏘아 죽이는 장면입니다. 이건 코미디로 폭력을 사용한 케이스이고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는 하지만 스탈린이나 베리야 같이 권력자가 아닌 죄없는 수용소 수감자를 대상으로까지 이런 폭력을 동원한 웃음을 줄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독재자와 권력자, 무고한 시민 사이에서 폭력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다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개인적으로 소소하나마 조금 걸렸던 부분입니다. 그 밖에 다른 부분은 원래 굉장히 센 표현을 하고 있는 원작을 순화했고 폭력에 대한 원칙을 잘 지켜서 코미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원작 그래픽노블과 달리 영화에만 등장한 강력한 모티브는 소변입니다. 역사적 기록으로도 스탈린은 쓰러져 카페트까지 축축하게 적실 정도로 오줌을 쌌다고 하죠. 스탈린은 소변에 관한 일화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을 보면 중앙위원회 회의를 몇 시간씩 길게 하며 아무도 못 나가게 만들어서 우리나라로 치면 각 부처의 장관들이 그 회의 자리에서 오줌을 싸게 만들어 모욕했다고 하죠. 혁명 동지이고 권력자들이지만 스탈린 앞에서는 공포에 질린 고양이 앞의 쥐였던 사람들이라 반항도 못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런 사실들과 관계 있을 것 같은데 스탈린은 자기가 쓰러질 때도 남들을 모욕했을 때처럼 추하게 오줌을 싸고 죽었다는 걸 굳이 부각시켜 보여준 것 같습니다. 그 밖에도 소변 모티브는 계속 등장합니다. 숲 속에서 소변을 보며 합종연횡을 꿈꾸는 말렌코프와 베리야의 대화도 그렇죠. 이를 통해 이 인물들이 얼마나 이상하고 비열한지 보여주죠. 한마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정말 지리는 인간들이다라는 표현법을 이 영화가 갖고 있어요. 베리야 처형 직전에는 흥분되서 오줌 좀 싸고 와야겠다는 몰로토프가 등장하기도 하고요. 처음 스탈린의 집무실 회식 자리에서 흐루쇼프는 자는 사람 물컵에 손가락을 담그면 오줌을 싼다는 속설을 얘기합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렇고 영화와 원작에서도 그렇고 스탈린은 죽기 직전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어쩌면 젖을 먹이는 그림 속 뿔에 담근 스탈린의 손가락이 그를 오줌 싸고 죽게 만든 것일 수도 있겠죠. 스탈린은 4일 동안 지극한 고통을 겪다가 죽었다니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치욕들을 겪으며 죽게 만드는 게 감독의 의중이 아니었을까요?


스탈린의 죽음은 자기가 저지른 독재의 결과가 목을 조른 셈입니다. 무자비한 독재로 주변 인물들조차 공포에 떨게 했기 때문에 쓰러진 날에도 감히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 볼 생각을 못 합니다. 심지어 실제 역사에서도 스탈린을 언제 깨워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다 보고인가 소포인가가 와서 거의 하루가 꼬박 지나서야 그 핑계를 대고 들어갔는데 이미 때는 늦었죠. 뇌출혈은 이른 발견과 조치가 가장 중요한 병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일찍 발견했더라도 치료할 의사가 없었을 겁니다. 영화와 원작에 등장하다시피 이미 유능한 의사들은 스탈린을 독살할지 모른다며 처형됐거든요. 의심과 질투가 많은 스탈린의 성격이 만든 결과입니다. 자업자득의 블랙코미디죠. 그 와중에 등장한 변변찮은 의사들의 소집이나 미국 의료 기계를 쓸 거냐 말 거냐를 놓고 해프닝을 벌이는 장면 역시 역사적 사실이니, 현실이 허구보다 더한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은 공산주의 혁명을 하기 전에 시인이었던 사람입니다. 교양 있고 예술적 심미안도 있는 사람이었죠. 그러고 보면 히틀러도 나치 당 활동을 하기 전에는 화가 지망생이었습니다. 20세기에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두 사람이 예술가 계통이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죠. 특히 스탈린은 자기 국민을 가장 많이 죽인 독재자 중 하나일 텐데 또 그런 예술적인 교양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는 지극히 검소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 허구의 캐릭터였다면 일관성이 없는 인물이라는 소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30년 넘게 공포로 집권한 스탈린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의심이 너무 많아 평생 2인자를 키우지 않던 그이기에 후계 구도에 대한 대비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진공 상태처럼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죠. 흐루쇼프, 베리야 등등 각자는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 자기들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왔습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볼품없는 외모와 실없는 소리를 떠들어대어 자신이 견제할 가치가 없는 놈으로 보이도록 자기비하를 했고, 베리야는 스탈린보다도 앞장서서 스탈린의 의중을 실현하는 걸로 자신을 보호했습니다. 흐루쇼프는 계속 말하는 사람이고 베리야는 계속 말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반대인 흐루쇼프와 베리야가 서로를 견제했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죠.


그들이 스탈린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진공 상태인 권력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몇 단계의 권력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전투로 벌어지는데요. 우선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스탈린이 총애했고 인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딸 스베틀라나에게 눈도장을 찍고자 하죠. 이를 확보하고는 여론 전쟁에 들어갑니다. 지배하는 인민의 마음을 얻어야 권력을 쥘 수 있으니까요. 원래 당시 소련 입장에서 비둘기파에 해당하는 정책은 흐루쇼프가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매파인 베리야가 느닷없이 뒷통수를 쳐서 흐루쇼프보다 먼저 비둘기 정책을 펼치죠. 이로 인해 중앙위원회 위원들끼리 이합집산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명목상으로는 부서기장이었던 말렌코프가 뒤를 이은 것 같지만 그는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허수아비일 뿐이죠. 권력을 쥐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물리적 무력의 충돌입니다. 모스크바를 봉쇄하던 베리야와 NKVD를 치기 위해 흐루쇼프는 역전의 용사 주코프 원수와 손을 잡고 붉은 군대를 동원해 모스크바를 개방합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인민들이 명령의 혼선 속에 NKVD에게 사살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론을 돌리기 위해 인민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모스크바를 개방한 흐루쇼프의 결정을 보면 그 역시 좋은 사람은 아니며 권력의 냉혹한 속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마지막을 향해 영화가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정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 흐루쇼프는 주코프와 나머지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모의해 베리야를 체포하고 그 자리에서 형식뿐인 군사 재판을 열고 즉결 처형합니다. 이때 영화의 프레임 바깥에서 베리야의 얼굴을 향해 느닷없이 총을 든 손이 밀고 들어와 그를 쏴죽이는데요. 이는 화면 바깥에 있는 감독이 이 캐릭터에 대한 단죄를 내리는 개입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문한 베리야도 죽기 직전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현실의 사담 후세인도 교수형을 당할 때 살려달라고 빌었다고 하죠. 독재자들은 자신의 결말을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그런 악행을 저지르나 봅니다.


이를 통해 흐루쇼프는 권력을 잡게 되고 이때 모의했던 나머지 동료들을 모조리 숙청하며 최고위 권좌에 오릅니다. 그나마 스탈린과 달리 그는 죽이는 게 아니라 좌천 혹은 귀양을 보내는 방식으로 숙청했다고 하죠. 흐루쇼프는 수정주의자였습니다. 인공위성이나 달 착륙 같은 우주경쟁으로 미국과 본격적인 냉전을 시작한 것도 흐루쇼프지만 대화를 하고 데탕트를 시작한 것도 흐루쇼프죠. 그래서 당시 모택동의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모택동이 스탈린주의자였기 때문이죠. 흐루쇼프는 권력에 오르고 스탈린의 모든 것을 격하했습니다. 엔딩 크레딧의 사진에서 얼굴이 지워지거나 배경이 합성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게 당시 소련의 정보 조작이라고 볼 수 있죠.


 

영화는 시작과 끝이 콘서트 장면으로 수미상관을 이룹니다. 용감한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가 연주하고 있는데 카메라가 점점 올라가며 VIP석 중앙에 앉은 흐루쇼프 내외를 비추죠. 영화가 끝나기 직전 흐루쇼프 뒤에 앉은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를 내려다보며 이런 자막이 뜹니다.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흐루쇼프는 11년 후 브레즈네프에 의해 실각하게 된다는 역사적 사실 말이죠. 자막과 화면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잘 매치한 좋은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빨간책방TV


〈스탈린이 죽었다!〉의 시네마톡은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원래 60분으로 예정된 행사였지만 워낙 얘기할 거리가 많아 80분으로 연장하여 진행됐습니다.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는 그 자체로 재밌는 블랙코미디 영화이며,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동진 평론가가 올린 원작 그래픽노블 《스탈린의 죽음》에 대한 유튜브 리뷰를 링크하겠습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신다면 훨씬 지적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4년입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책에서 여러 저자분들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피력하셨는데요, 여기 간략히 정리합니다.  

 

 

요즘은 문밖을 나서 조금만 걸으면 거리에 걸린 노란 바탕색 현수막 천에 박힌 검정색 글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중에는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유가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 애도도 있고, 정치인들의 ‘보여주기’식 행위도 있습니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한 후 참 많은 진단의 언사가 있었습니다만, 단연 정확하고 포괄적인 진단은 ‘대한민국 전체가 침몰 중’이라는 선언(!)일 것입니다.


대체 우리는 어디에 빠져서 침몰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는 서방 식민 제국의 자본주의가 무차별적으로 이식되면서 자체의 역량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급격하고 과격하게 자본주의로 편입되었습니다. 한국은 전후 복구와 재건이 최우선 과제가 되면서 자본의 개발과 성장 논리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회가 되었고, 급기야는 사회 전체가 무한 증식하는 자본의 거대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바다에서 구명해줄 보트나 조끼 따위가 있긴 하지만 그 수는 턱없이 모자라고 또 아무나 타고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야말로 피튀기는 생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보트를 탄 사람들과 구명조끼라도 입은 사람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버티며 살벌한 각축전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 어떤 연대도 연민도 없습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타인을 향한 서슬 퍼런 차가움만 있을 뿐입니다. 살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삶 속에선 자존감은커녕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갖기 어렵습니다. 쌍용자동차 부당 해고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이 그렇고, 평생의 삶터를 지키기 위해 밀양에서 송전탑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하루가 그렇습니다.

 

자본 권력의 공격에 ‘인제, 그만!’이라고 외칠 때도 되었는데, 아니 한국 사회의 내구력은 진작 ‘임계점’에 달했는데, 왜 우리는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죄 없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있는 것일까요?

 

―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들》 옮긴이 후기 중에서

 

 

 

 

이 글은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분들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려 쓰는 글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그 무게를 알지 못하고, 글 몇 줄로 나서서 위로할 자격은 더욱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참사를 목도한 우리도 심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야기하는 분노와 환멸도 있지만, 어린 학생들의 때아닌 희생, 그리고 그로 인해 환기된 죽음 자체의 어두움이 전하는 절망과 허무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풀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저 자신에게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우리는 죽어서 우리를 만들어준 별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을, 새로운 삼라만상을 탄생시킵니다. 이 광대한 순환의 드라마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인간적인 처연함과 안도감이 교차합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용을 써 본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요. 부자가 되고 유명인이 되고 나아가 세계를 정복한다 한들 광대한 시공간 속에서는 티끌이자 찰나일 뿐입니다. 은하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운다 한들 긴 세월이 지나면 결국 폐허로 변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가는 우주적 순환 과정의 신성한 일부라는 사실과 우리를 이루던 요소들이 머나먼 시공을 넘어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가요. 그간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과 앞으로 죽음을 맞이할 우리와 한때라도 여기 존재하던 모든 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죽음의 허망함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절실한 소중함으로 뒤바뀝니다.


그렇다 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이 거대한 의미만을 붙잡고 살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의 일은 이곳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죽음은 삶의 귀결이지만, 삶이 죽음을 ‘목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특히 때아닌 어린 죽음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삶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과 슬픔을 줄이고 악을 단죄하는 일은, 탄소나 인 같은 원소로 이뤄진 존재가 아닌 의지와 양심이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당연한 책무입니다. 지옥 같은 배 속에서 먼저 떠난, 어쩌면 아직도 버티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이미 떠난 사람들로 인한 공허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훌륭한 세상을 만든다 한들 아이들이 되살아나 그곳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국이 정말 있어서 모두가 그곳에 갔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 비뚤어진 나라에서 어려서부터 겪어야 했던 삶의 무게와 죽음의 공포가 한낱 꿈이었을 뿐이고 이제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저는 순진했던 우리 아이들이 조금 먼저 별을 향해 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천천히 그곳을 향해 가고 있고요. 언젠가 때가 되면 만나서, 살아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대한 기적의 신성한 일원으로 함께할 거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때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 《파토의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중에서

 

 

 

 

2014년 4월 16일… .
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공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 중에서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여 탑승자 476명 가운데 29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2017년 11월 현재까지 5명은 실종(미수습) 상태다. 대참사가 일어난 그날,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대통령이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약 7시간 행적이 공백으로 남아 무수한 추측이 난무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문제가 불거지자,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행적은 국가 기밀 사항이라 절대 발설할 수 없다. 만약 그랬다가는 북한의 공격 목표가 되어 국가 안보가 위험해진다. 세상 어디에도 대통령의 행적을 일일이 다 국민들한테 밝히는 나라는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600년 전 조선왕조 시절에도 국가 지도자의 행적은 국가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사관들의 손에 의해 낱낱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태종 임금은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한 일이 창피해서 실록에 적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발언조차 고스란히 실록에 담겨 있을 정도다.

 

이런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데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과 관련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거나,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조차 폐기한 흔적이 역력하다. 행여 기록이 남겼다가 비판을 받을까 봐 없애버린 것이다. 이것이 역사 말살이 아니고 무엇인가?

 

조선이 구시대적인 전제왕권 국가라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론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과 같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이자, 보수층이 본받아야 할 선진국이라고 그토록 선망하는 미국은 어떨까? 미국의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은 전 세계 테러리스트들의 최고 공격 목표다. 이 때문에 미국 백악관에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중무장한 경호 부대가 배치되어 있다. 그렇지만 미국 대통령의 모든 행적은 낱낱이 기록되고 백악관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모든 국민이 볼 수 있다.

 

똑같은 국가 지도자인데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행적을 다 공개했고, 한국 박근혜 대통령은 행적을 끝까지 숨겼다. 이제 와서 보면 2014년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무슨 일을 했느냐보다 대체 7시간의 행적을 왜 감추려고 했는지가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 《부끄러운 이명박근혜 9년》 중에서

 

생각비행은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 한 분 한 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시대적 소명으로 사회에 유익한 책을 펴낼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울러 세월호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는 그날까지 연대하겠습니다.

다음뷰, 믹시, 블로그 코리아, 올블로그, 올포스트, 레뷰 그리고 알라딘 창작블로그. 이 이름이 무엇인지 전부 알고 계신 분이라면 아마 블로그를 하신 지 10년은 되신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른바 메타 블로그들로 SNS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 블로그 콘텐츠가 집합하는 사이트였습니다. 일종의 블로그 허브라고나 할까요. 이런 서비스를 통해 많은 이웃 블로거와 독자들이 유입되곤 했습니다.


출처 – 다음 뷰 블로그


페이스북의 '좋아요' 이전에 손가락 추천 버튼의 대명사가 이런 메타 블로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메타 블로그의 기능을 사실상 SNS의 공유하기 기능이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메타 블로그들은 거의 다 서비스를 종료했습니다. 그와 함께 블로그가 가졌던 콘텐츠 파워와 소통의 힘이 급격하게 SNS로 이동하게 되었죠. 서두에 언급한 시대를 풍미했던 메타 블로그 서비스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알라딘 창작블로그가 지난 2018년 4월 10일 서비스를 종료했습니다.


출처 – 알라딘 창작블로그


인터넷 서점으로 유명한 알라딘에서 운영하던 메타 블로그 서비스인 창작블로그는 이름 그대로 책과 문화를 중심으로 한 블로거들이 주로 쓰던 메타 블로그 서비스였습니다. 이름 때문인지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책을 좋아하거나 순수하게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만 콘텐츠를 발행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오해도 받으면서 심리적인 허들이 좀 높은 편이었다고 하죠.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2010년 알라딘이 창작 블로그를 열며 세운 모토는 프로 작가부터 아마추어 작가, 이제 글쓰기를 시작한 블로거까지 누구든 환영한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출처 – 알라딘 창작블로그


여느 메타 블로그와 다르게 콘텐츠의 허브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었기 때문에 책과 문화를 좋아하시는 블로거들은 좀 귀찮더라도 알라딘 창작블로그 위젯을 꼭 끼워넣으셨을 겁니다. 요즘처럼 좋아요 버튼, 공유하기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해결되는 SNS 세상과는 달리 자신이 쓰는 연재물 관리에 들어가 일일이 추천 버튼 코드를 복사해서 붙여넣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랐지만 말이죠.




알라딘 창작블로그 서비스가 론칭한 2010년에 블로그를 시작한 생각비행도 콘텐츠를 발행할 때마다 창작블로그 위젯을 달았습니다. 생각비행이 알라딘 창작블로그에 마지막으로 발행한 콘텐츠는 서비스 종료일 아침에 발행한 ‘개정된 근로기준법으로 워라밸 찾을 수 있을까?’가 되었습니다. 4월 10일에는 서비스가 종료되어 추천 버튼이 활성화되지는 않더라도 위젯의 모양새는 유지되고 있었으나 하루가 지난 오늘부터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출처 – 알라딘 창작블로그


사실상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메타 블로그인 창작블로그가 서비스를 종료하는 걸 보니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다고 실감하게 됩니다. 진즉 SNS로 갈아탄 분이 대다수겠으나 아직 많은 정보가 블로그에 남아 있고, 길고 심층적인 정보들은 블로그에 기대는 면도 있습니다. 당분간은 메타 블로그의 기능을 SNS가 대신하며 블로그 콘텐츠들이 유통되긴 할 겁니다. 그러다 어쩌면 메타 블로그가 없어졌듯이 블로그라는 형태의 서비스가 종료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지만, 사람들은 서비스 형태가 바뀌더라도 콘텐츠를 만들어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는 계속 드러낼 것입니다. 생각비행도 블로그 이후에 어떤 형태가 되든지 간에 독자 여러분께 뜻깊은 콘텐츠로 계속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9년간 수많은 독자와 교류할 수 있게 해준 알라딘 창작블로그에 고마운 마음과 아쉬운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 알라딘 창작블로그! 그동안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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