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25일은 법의 날입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 앞에 평등'이라는 말이 무색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법에 대해 할 말이 많습니다. 권력의 횡보를 막고 폭력의 지배를 배제하고 인권을 옹호하며 공공복지를 증진하려면 무엇보다 법적 질서가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월 10일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정농단으로 한국 사회를 문란케 한 현직 대통령을 파면한 역사적 결단은 의미가 큽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으로 3개월여 탄핵심판 절차가 마무리됐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대통령이 법적 절차에 의해 구속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원칙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최순실로 대표되는 비선과 현직 지도부의 결탁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어지럽히던 일부 세력이 법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국정농단 이후 이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준법정신, 법의 존엄성 이전에 법에 미안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우선 국정농단의 핵심이자 이 사태로 가장 오랜 기간 수사를 받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구속영장 기각이 있었습니다. 박영수 특검 당시 영장이 기각되어 국정농단의 마지막 보스는 박근혜도 최순실도 아닌 우병우가 아닌가 하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죠. 보강 수사로 수많은 자료를 모아 영장을 재청구했을 땐 100퍼센트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으로 검찰이 호언장담했습니다. 물론 국민도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4월 12일 서울중앙지법 권순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혐의와 관련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출처 - 노컷뉴스


우병우가 혐의를 잘 감춰서 그러한가 했는데, 밝혀진 이야기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정황이 보입니다. 지난 13일 사정 당국에 따르면 검찰이 청구한 우병우 구속영장의 분량은 20쪽 정도였습니다. 검찰이 특수본을 세워 우병우의 범죄를 밝히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정작 특검 때보다 범죄 사실 분량을 3분의 1로 줄여 영장 청구를 했기에 검찰의 제 식구 봐주기라는 질타가 쏟아졌죠.

 

출처 - 경향신문

 

검찰이 우병우를 손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 검찰총장을 비롯해 국정농단 당시 수천 번 전화 통화를 했던 검찰 수뇌부가 물귀신처럼 함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박영수 특검이 우병우 일가가 가족회사의 자금을 횡령한 사실을 확인하고 자료를 넘겼으나 검찰이 이를 뭉갠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법의 칼날이 누구 앞에선 무뎌지고 누구 앞에선 날카로워진다면 '법 앞에 평등'이라는 헌법 정신이 훼손됨은 명명백백합니다.


출처 - 뉴스1


법의 정신을 짓밟는 것은 검찰만이 아닙니다.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도 유야무야 지나가는 중이죠.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 수뇌부가 법관들의 사법개혁을 논의하는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탄압했고 이른바 진보 성향의 법관들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죠. 문체부의 문화계 인사를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가 사실로 드러나 사회적 충격이 컸는데, 공명정대한 법 집행을 해야 할 법원 안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컸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직접 임명한 진상조사위원회는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부당한 압력은 일부 인정했지만 법원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는 조사 자체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내놨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제기한 판사들이 블랙리스트 파일이 든 것으로 추정되는 법원행정처 컴퓨터 조사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이후 이 컴퓨터의 파일이 대거 삭제됐다는 진술까지 나왔습니다.


법의 날을 맞이해 묻고 싶습니다. 법과 관련된 종사자들이 과연 대한민국 국민에게 법을 계몽할 자격이 있습니까? 검찰과 법원의 부끄러운 자화상만 드러나는 법의 날이 아닌가 합니다.

 

이명박 정권 당시에 불거졌던 '국방부 지정 불온 도서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김진숙 씨의 《소금꽃나무》,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 등의 양서가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합한 서적'으로 분류되어 이른바 불온도서로 지정되었죠.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의도와는 반대로 국가 공인 불온도서들은 매스컴을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오히려 불티나듯 팔린 아이러니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작은 일화만 봐도 사상 검열이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권의 치졸한 발상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낳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특유의 '창조'적 생각으로 문화계 전반을 살리고(?) 싶었나 봅니다. 청와대가 9473명, 거의 1만 명에 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한국일보

 

 

지난 11일 국정감사장에서는 청와대가 지난해 문화예술계에서 검열해야 할 9473명의 명단을 작성해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보냈다는 자료가 공개되었습니다. 그동안 청와대가 정치검열을 위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루머가 흉흉했는데 사실로 드러난 것이죠.


출처 - MBN


그런데 이 블랙리스트의 기준이 괴상합니다. 지난해 5월 1일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문화인 594명, 2014년 6월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754명,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예술인 6517명, 2014년 서울시장 선거 때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 등입니다.

 

이명박 정권 때 나온 국방부 불온도서는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같은, 웃기긴 하지만 나름대로 기준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작품(도서)이라는 결과물에 대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시국 선언을 했으니까, 문재인을 지지했으니까, 박원순을 지지했으니까'처럼 유치원생 같은 기준으로 정한 겁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냥 '난 네가 싫어' 하고 딱지 붙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해당 기관인 청와대와 문체부에서는 "오해다" "그런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눈가리고 아웅 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블랙리스트 때문에 실제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알 만한 분이 수두룩하죠.


출처 - 중앙일보


문체부의 대본 공모 지원, 우수 작품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된 박근형 연출가의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선정이 확정되었으나 지원금 포기를 종용받았다고 하죠. 선정 직후 블랙리스트가 청와대에서 하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박근형 연출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작품인 〈개구리〉를 무대에 올린 전적이 있습니다. 

 

이윤택 연출가의 희곡 〈꽃을 바치는 시간〉도 문체부 심사에서 1위를 받고도 지원작 선정에서 탈락했습니다. 배후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2014년 광주 비엔날레 당시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시선이 담긴 작품 〈세월오월〉 전시 문제로 홍역을 치른 홍성담 작가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시대가 인정한 빼어난 결과물을 냈음에도 단지 박근혜 정권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다니,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이 얼마나 말뿐인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집요하게 포기를 종용하고 재심사에 재심사를 해도 떨어지지 않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문체부가 전산망에 작가도 모르게 임의로 포기서를 제출하여 나중에 징계를 받은 경우도 있다고 하죠. 이러니 오히려 작가들 입장에서 '뭘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하나' 싶을 정도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출처 - 한겨레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확인되자 박근형 연출가는 "워낙 어처구니없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예상은 했다"고 심경을 전했습니다. 또한 많은 예술인이 충격보다는 "솔직히 현 정부가 그런 성향이기 때문에 '그럼 그렇지' 하는 분위기다"라고 밝혔습니다. 한 영화 제작자는 "박정희 시대에나 있을 법한 저런 유치한 리스트가 말이 되느냐. 리스트가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세월호, 문재인, 박원순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눌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죠.

 

자기들 눈에 거슬리면 돈줄, 밥줄 끊는 게 이명박근혜 정권의 더러운 습성이라지만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문화예술계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보면 우리 사회가 대체 얼마나 퇴행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출처 - 페이스북


사람들은 지난번 불온도서 사건 때처럼 이번 블랙리스트를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실린 작가라고 SNS상에 커밍아웃하며 '청와대 공인' 예술가임을 즐기고 있죠. 한편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작가들은 수치스럽다며 박근혜 정권을 더욱 '가열차게 까드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여기서 잠깐. 배우 백윤식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시면 아시겠죠?


출처 - 〈그때 그 사람들


지난해 〈다이빙벨〉 상영으로 취소 위기까지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열리게 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계 각국의 영화계 인사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성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인 토니 레인즈는 "시장이 이야기도 듣지 않고 본인의 생각만 주장한다. 굉장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형편없는 정치인은 빨리 물러나게 해야 한다. 제대로 된 시장을 선출해야 한다. 다음 선거 때 잘 뽑아야 한다"며 거침없이 부산국제 영화제를 파행으로 이끈 서병수 부산 시장과 이명박근혜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토니 레인즈는 "서병수 시장이 어리석고 멍청한 행동을 한 것은 박근혜가 대통령이고, 새누리당이 여당이라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박근혜 정권은 부산국제영화제 20년을 거친 정권 중 좌우를 가리지 않고 특히 더 멍청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평론가 장미셸 프로동 또한 부산영화제 사태는 부산과 한국만의 이슈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라고 강조하며 지난 19년을 거치며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가 단 한 번의 실책으로 몰락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실력 있는 작가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상 대상에서 떨어뜨리고, 이미 자리 잡은 영화제를 몰락 직전의 위기로 내모는 짓이 박근혜 정권이 자랑하는 창조경제의 진상입니다. 이런 망측한 일들을 저지르는 작자들이 문화융성을 위해 미르재단을 설립했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문득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당시 문화 부문 정책이 그리워지는군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출처 - 경향신문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인 법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사상을 검열하고 표현의 자유를 옥죄려는 시도는 역사 이래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문화계의 특성상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억압하고 핍박할수록 더 많은 조롱과 풍자가 쏟아져나올 겁니다. 생각비행도 청와대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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