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트럭을 타고 羅州로 대피했다. 20일 光州의 세무서와 MBC KBS가 불타고 시민들이 광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광주로 들어갔다. 시내 곳곳마다 검은 연기가 솟아 올랐고 군용트럭에 탄 시민들이 애국가와 반정부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군용트럭을 타고 시내를 돌아봤는데 갑자기 월산동로터리 부근에서 헬리콥터가 나타나 사격을 가했으며 길가의 한 학생이 쓰러졌다.”

(광주사태부상자회 이광영 부회장)


“한편 금남로에서는 도청 부근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며 MBC가 있는 제봉로 근처에서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금남로 주변의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일시에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안으로 숨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희생되었다.”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처 - 5.18기념재단


군부 독재가 자행한 자국민 학살로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억되는 1980년 5.18민주화항쟁. 전두환 등 지휘자의 부정과 은폐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정황이 담긴 증언과 기록을 보다 보면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그것도 적이 아닌 자신들이 지켜야 할 국민을 향해 어떻게 군인이 총질할 수 있는지 억장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확실하게 인정되지는 못했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이 헬기에서 기총소사했다는 광주 시민들의 증언과 기록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12.12 관련 재판에서도 군 당국 역시 헬기나 탱크 등의 투입은 없었다고 잡아뗐죠.


출처 - SBS


그런데 지난 12월 15일 5.18기념재단의 발표에 의하면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군요. 전두환 정권이 시민을 학살하는데 헬기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 말입니다. 지난 13~1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광주 전일빌딩 10층 내부에서 총탄 흔적 130여 개를 육안으로 확인했습니다. 총탄 흔적은 1980년 5월 당시 전일방송국이 있던 10층 내부의 기둥에서 50여 개, 천장에서 30여 개, 바닥에서 50여 개 등 총 130여 개가 나왔습니다. 국과수는 총탄 흔적의 방향이나 각도 등을 고려할 때 공중에 떠 있는 헬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탄흔 크기로 볼 때 헬기에 달린 기총보다는 작은 5.56mm 총탄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헬기에 탑승한 계엄군이 소총으로 난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1980년 5월 당시 금남로 주변에 전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으므로 계엄군이 헬기를 동원했다는 것에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출처 - 뉴스1


1980년 5월 당시 옛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소유의 건물이었던 전일빌딩 10층은 전일방송 영상 데이터베이스 사업부가 사용했는데, 당시 전일빌딩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언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광주공원, 사직공원, 월산동 인근에서 헬기 사격에 대한 증언이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희생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5.18 이후 10층은 사무실을 비웠다고 합니다. 그 후 쭉 공실이었던 이 건물에서 무더기 총탄 흔적이 나올 거라곤 광주시나 5.18 단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총탄 자국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출처 - 한겨레


계엄군이 헬기 사격 요청을 했다는 내용이 담긴 군 보고서가 최근에 확인된 바 있습니다. 전 5.18유족회장인 정수만 5.18연구소 비상임연구원은 1980년 9월 5.18 계엄군이었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육군본부에 제출한 '광주 소요사태 분석 교훈집'에 헬기 사격 요청 내용이 있다고 지난 18일 밝혔습니다. 보고서에는 항공기임무 항목에 '무장 시위 및 의명 공중화력 제공' 요청이 있을 시 공중 사격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공중 사격 지시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뤄졌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군은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 의혹을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해왔으나 최근 드러난 증거를 통해 5.18 민주화항쟁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군사 독재의 책임을 더 깊이 물을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문제는 전일빌딩의 보존 방식입니다. 1968년 세워진 전일빌딩은 노후화되어 리모델링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5.18 당시 옛 전남도청 광장, 분수대에서 쫓겨온 시민들이 계엄군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 바로 이 건물이었고, 그당시부터 총탄 흔적이 꾸준히 발견되는 사실 등을 이유로 5.18 단체 등은 리모델링 계획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에 광주시가 전일빌딩의 노후화와 사적가치 등의 조사를 시행하고, 이 과정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건물 10층에서 헬기 사격 탄흔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이 때문에 리모델링하려던 계획을 바꿔 체계적인 건물 보존 방안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가능하다면 국가사적지로 정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원폭돔이나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처럼 역사의 흔적이 담긴 상징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삼엄한 군사 독재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저항한 민주 시민들이 있었음을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올해로 36주기가 되는 5.18 민주화항쟁도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으로 시작했습니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이런 일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죠. 박근혜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실상 제창하지 못하게 지침을 내렸으며 박승춘 보훈처장은 이 교시를 받들어 올해도 제창을 불허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청와대 회동에서 협치를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또 하나의 쇼였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야당은 청와대 회동 무효를 선언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심지어 새누리당 원내대표조차 청와대와 보훈처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야당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내기로 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


1997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제창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제외되기 시작했습니다. 집권당과 정권의 성격을 보면 그 의도가 너무나 명백하죠. 보훈처의 해석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적으로 제창과 합창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개념이지만, 보훈처의 유권해석으로는 제창은 참석자 전원이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지만 합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죠.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5.18 민주화항쟁 기념식 동영상을 보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입을 다물고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외워서 부르고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주먹을 움켜쥔 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반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들고 있는 종이만 들여다볼 뿐 입을 열지 않습니다.


출처 - 유튜브


보훈처의 유권 해석대로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국가 기념식의 관행을 어긴 것이며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를 고의로 부르지 않은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보훈처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례와 무식함을 계속 알리고 싶어 이런 방침을 자꾸 고수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를 막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고 있는 걸까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그 이유가 그대로 드러나긴 합니다.


출처 - 페이스북


〈임을 위한 행진곡〉은 보수단체의 주장과 달리 종북이나 김일성 찬양을 위한 노래가 아닙니다. 탈북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는 주성하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에서 허락없이 부르면 잡혀가 정치범이 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과 연결시키는 찌질한 짓거리" 좀 그만하라면서 말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한 노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보면 그 수준의 저열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한편 5.18 민주화항쟁 당시 학살의 책임자였던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4대 조건이 선결되어야 된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신변 보호와 박탈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를 갖추는 등의 조건이 선결되어야 5.18 묘역을 참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광주에서는 죄인에게 무슨 예우냐는 반응이 나오고, 5.18 관련 단체는 책임 인정과 광주에 대한 사죄 그리고 대국민사과가 선결 조건이라고 대응하기도 했죠. 

 

출처 - KBS


하지만 살인마 전두환은 지난달 27일 《신동아》 기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항쟁 당시 시민군을 향해 총을 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동석한 전두환의 지인들도 인터뷰에 참여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나왔습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광주 침투와 관련된 정보 보고를 받은 적 없다는 전 전 대통령 말에)


고명승 전 삼군사령관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연희동에서 코멘트 한 일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전 의원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전 대통령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일베에서 5.18 관련으로 "종북, 빨갱이" 타령할 때 흔하게 나오는 주장이 북한 특수군 얘기죠. 그런데 그 주범인 전두환이 이런 논거를 부정한 셈입니다. 광주와 북한이 관련 있다는 일베의 주장이 헛소리임을 전두환이 밝힌 셈입니다. 한편 역사적 책임감으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두환은 "광주에 내려가 뭘하라고요"라고 되물어 책임 인정과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출처 - 스포츠동아


한국인 작가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얘기했죠.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출처 - 《소년이 온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과 같이 고립되고 힘으로 짓밟히고 훼손된 사건 이면에는 광주를 수없이 되태어나게 한 국가의 원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해마다 후벼지는 그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철철 나고 있습니다. 5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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