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마무리하며 크리에이티브 시각디자인 집단인 버틀러 잉크(Beutler Ink)에서 한 해 동안 벌어진 전 세계 사건, 사고를 한 장의 그림에 담았습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이 그림은 16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명화인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패러디하여 제작된 것입니다. 그림 안에는 탐욕스러운 트럼프 당선부터 카스트로,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등 우리 곁을 떠난 명사들에 대한 추모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연 어떻게 표현되었을까요? 삼성 갤럭시노트7 폭발 사건이 조그맣게 실려 있을 뿐입니다. (그림에 노란색 상자로 표시해두었으니 그림을 클릭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면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군요.  

 

출처 - Beutler Ink.com


2016년은 우리나라나 전 세계적으로 정말 '격동의 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해였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에겐 흥미진진할 장면일지 모르겠으나 '지금'을 사는 우리에겐 더없이 고된 한 해였죠. 굵직한 사건만 훑어봐도 이렇습니다.

 

 1월 북한 4차 핵실험

 2월 개성공단 폐쇄

 3월 이세돌 vs 알파고 대국

 4월 총선으로 16년 만에 여소야대 및 3당 체제 형성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6월 브렉시트

 7월 영남권 진도 5 규모 지진

 8월 브라질 대통령 탄핵 및 갤럭시노트7 폭발 사건

 9월 이화여대 정유라 특혜 의혹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 JTBC 태블릿 PC 특종

11월 카스트로 사망 /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12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100만 촛불집회 / 탄핵 가결 / 송박영신


이미 일어난 일들이긴 합니다만 정치, 사회, 경제적인 이슈부터 자연재해와 세계적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많은 일이 대체 어떻게 한 해 동안 다 일어날 수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훗날 2016년 역사를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이 시기를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집니다.


출처 - 유튜브

 


이 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 우리가 이뤄낸 것 역시 작지 않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국회를 움직여 대통령 탄핵 가결을 이끌어낸 일은 하나의 쾌거이자 세계인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영국 BBC는 100만 명 이상이 모인 대규모 시위를 평화롭게 진행한 대한민국 시민의 힘에 놀라워했습니다. 폭력으로 권력을 뒤집어엎는 피의 혁명이 아니라 평화와 비폭력의 방법으로 국민이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그 대리자인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뜻을 받들게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교과서와도 같은 모습을 거시적으로 실현해냈기 때문입니다.


출처 - JTBC


이 때문일까요? 2016년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습니다. 《교수신문》은 전국의 교수 611명을 대상으로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이메일로 설문조사를 진행해 2016년 한 해를 규정할 사자성어를 뽑았다고 밝혔는데요, '군주민수'란 《순자》의 왕제 편에 나오는 말로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君以此思危 則危將焉而不至矣)."는 뜻입니다.

 

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 교수는 좀 더 전복적인 추천 사유를 덧붙였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군주가 배고 백성은 물이란 비유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개념이라는 거죠. 유가사상에 입각한 전국시대의 지식인인 순자가 지배자에게 민본주의를 훈수하는 제왕학에서 파생됐기 때문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더 이상 무조건 존경받아야 하는 군주도 없고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있는 착하고 어린 백성도 없으니 이 사자성어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번역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민주공화국에서 권력자는 국민의 힘을 대리하는 선출직 공무원일 뿐임을 잊어선 안 될 이유입니다.



이 밖에도 '역천자망(逆天者亡)' '노적성해(露積成海)' '빙공영사(憑公營私)' '인중승천(人衆勝天)' 등 민주주의 원칙과 재권주민의 의미를 밝히고 공적인 일을 빙자해 사익을 챙긴 이들에 대한 비판이 어린 사자성어가 후보에 올랐다고 합니다.

 

출처 - 뉴시스

 

2016년 12월 31일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도심에 시민 110만 명이 운집해 '송박영신' 촛불집회를 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박근혜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길 바란다는 염원이 10차 촛불집회까지 누적인원 1000만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출처 - YTN

 

201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7년은 최순실-박근혜, 그리고 그 부역자들을 엄벌에 처하고 세월호를 비롯한 숱한 의혹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생각비행 독자 여러분의 행복을 빕니다. 저희도 사회에 필요한 책을 펴내면서 힘차게 날아오르겠습니다.

 

학내에 경찰 수천 명이 치닫고 졸업식이 파행을 겪으며 정권에 대한 비판과 총장 퇴진을 외치는 모습... 아마 1980년대 독재 타도 시절 대학가 풍경인가 하고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2016년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자대학교인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이런 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생교육 단과대학사업인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화여대의 학내 분규 사태가 한 달을 맞은 지난 8월 26일, 교내 대강당에서 개최된 2015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은 마치 독재 시대 때처럼 여러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출처 – 헤럴드 경제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이 학위수여식사를 낭독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서자 2층에 자리 잡고 있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해방 이화, 총장 퇴진"이란 구호를 외치며 일어났습니다. 학부모들과 일반 학생들이 자리 잡은 대강당 2층에서는 최 총장을 반대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 설치 문제를 놓고 학교 측과 학생 측이 충돌을 빚었습니다. 이 때문에 학부모들이 나서서 교직원들을 막아서는 일도 생겼습니다. 한 달 동안 벌어진 교내 충돌 상황이 그대로 재연된 겁니다.


출처 - 한국일보


이화여대 내의 단과대학사업이 이런 사태로 비화한 원인은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평생교육 단과대학사업인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때문입니다. 미래라이프대학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사업입니다. 2년 6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직장인들이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코스죠. 

 

학생들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욕구를 참아가며 인생을 올인해 이화여대에 입학해 허리가 휘는 등록금을 내고 4년 동안 공부해야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반면 직장인들은 2년여 만에 간단히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학교 측은 학생들과 충분히 논의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미래라이프대학을 신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돈벌이를 위해 학문을 버렸다며 학교 측이 노골적인 학위 장사를 시작했다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출처 - 뉴시스


문제를 인식한 이화여대 학생들은 지난 7월 28일 SNS를 통해 소통하며 삼삼오오 이화여대 평의회 위원들이 회의 중이던 본관에 모여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사업 방침에 반대하는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몇 명에서 시작된 농성이었으나 점점 참여하는 학생이 수백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또다시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학교 측에서 112에 신고하여 자신들이 감금되었다고 한 것이죠. 사태를 관망하던 경찰은 옳다구나 싶었는지 무려 1600명의 경찰을 이화여대 시위 현장에 투입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200여 명의 여학생이 있었으니 무려 8배 정도의 경찰력이 투입된 겁니다.

 

지난해 10월 29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여성의 힘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제50회 전국여성대회에 참석차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을 거부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인 학생들에 의해 가로막혔던 일이 기업 납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모교를 방문한 대통령에게 국정교과서와 노동개악 추진을 중단하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손솔 총학생회장은 "박 대통령은 대학가에서 커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은 적이 있느냐”며 "유신시대로 되돌리려는 박 대통령의 방문은 필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대 사태 때 이례적으로 1600명의 경찰력이 동원된 것이 지난번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대통령을 욕보인 학생들을 벌하는 듯한 느낌은 저희만 받은 걸까요? 아무튼 학교와 경찰이 계속 악수를 두며 이대 사태가 커지자 이화여대는 우리가 안 불렀는데 경찰이 왔다며 거짓말로 사태를 수습하려다 일을 더 크게 키웠습니다. 회의장에 감금된 위원을 나오게 해달라고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 명의로 들어간 공문도 공개되었죠. 정황을 잘 살피면 대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총장과 학교 측이 경찰에 팔아넘긴 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뉴시스


이후 이화여대 사태는 점입가경입니다. 지난 8월 1일 미래라이프대학사업에 반대하는 재학생들의 점거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공권력 투입에 반발한 이화여대 졸업생들과 학부모들까지 가세해 경찰 추산 7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문제로 논란을 겪고 있는 동국대, 외대 등도 성명을 내고 각기 시위에 돌입했지요.


출처 - 한국일보


이번 이화여대 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 근원에는 정부가 주도한 대학 구조조정 사업이 있습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가시화되어 대학 부실에 대비해 선제적 구조조정을 시작한 것인데요, 학내 의견 수렴 없이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되어 끝없는 갈등을 빚었죠. 진행 방법도 문제였습니다. 재정지원사업을 경쟁 구조로 재편해 대학들의 복종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등록금을 멋대로 올리기 힘든 상황에서 정부 지원금으로 재정의 상당 부분을 충당해야 하는 대학으로서는 이 사업을 따야만 했습니다. 결국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닌 직업훈련 양성소로 탈바꿈했고, 학과 통폐합을 진행한 것도 모자라 돈벌이에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이대 사태 역시 돈이 되는 사업을 따내기 급급해 벌어진 일입니다. 돈을 미끼로 학교를 쥐고 흔드는 정부와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학교 당국의 독단적 의사 결정 구조 및 후진적 마인드가 사태의 본질인 겁니다.


출처 - 한국일보


이화여대는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들과 학부모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들을 경찰에 떠넘기고 대화조차 회피해온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처 - 한국일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운동권 문화가 이끌던 1980년대 대학 시위나 농성은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학원 자율화 등의 외침이 학교가 연루된 시위의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시위의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이대 사태처럼 학생들은 이제 외부 사회가 아닌 학내 문제, 자신의 문제에 거세게 분노합니다. 시위 현장에선 민중가요가 아닌 소녀시대의 노래를 합창합니다. 과거 의식화 교육을 해주던 선배와 조직의 힘 대신 공감과 SNS를 통한 느슨한 연결이 농성 현장으로 학생들을 견인합니다. 시위의 주모자가 없는 이대 사태에서 주모자 색출에 전전긍긍하는 학교나 경찰을 보노라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사회도 달라졌습니다. 1980년대는 시위를 했더라도 졸업하고 나면 대기업을 골라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사회적 문제와 민주주의, 정의 등의 대의에 학생들이 청춘을 불사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도 자기 한 몸 건사하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거의 모든 대학생이 3000만 원에 달하는 빚을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번 이대 사태에서 학생들이 이례적으로 시위와 농성을 꾸준히 이어가고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적극 참여하여 힘을 실어주는 것은, 고생하여 손에 넣은 이대 졸업장을 헐값으로 만들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뇌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뀐 시대, 바뀐 사회, 바뀐 학교... 변해가는 현실 때문에 입맛이 쓰기도 하지만 결국 대학은 학생이 주체로서 당당히 설 수 있을 때 가치 있는 교육의 장이 되는 겁니다. 학생들의 권리와 행복을 앗아가는 어떠한 현실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학교와 정부 당국이 깨닫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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