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이라는 스페인 공포영화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 아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아이들이 우리와 똑같은 놀이를 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영화에서 술래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 대신 “Un, dos, tres, Toca la pared(하나, 둘, 셋, 벽을 만져라)"라고 말하는 것만 다를 뿐, 술래가 돌아볼 때 움직이면 안 된다는 놀이 방식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스페인과 우리나라 사이에 놀이문화가 직접 교류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처럼 똑같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이 참 신기합니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이라는 영화의 제작자 중 한 명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기예르모 델 토로'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제작자는 '마르 타르가로나'라는 스페인 여성 감독입니다. 이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지난 2018년에 넷플릭스에 공개했습니다. 이 영화가 바로 생각비행이 펴낸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작품,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입니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울의 아들〉 등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과 강제수용소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피해자들을 다룬 홀로코스트 영화는 꽤 존재합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부터 예술영화까지 다종다양하죠. 홀로코스트를 다룬 그래픽 노블 중에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작품 중에서 〈마우터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영화가 독특한 이유는 실화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스페인 사람들의 홀로코스트를 조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영화 제목에 나오는 '마우트하우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건설한 강제수용소의 이름입니다. 생각비행이 펴낸 책은 '마우트하우젠'으로 번역되어 있죠. 마우트하우젠은 오스트리아에서 화강암을 채석할 수 있는 지역의 지명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명명했습니다. (이후 영화 제목을 제외하고는 '마우트하우젠'으로 통일하여 쓰겠습니다.) 이곳은 이른바 '절멸수용소'였습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25곳의 수용소를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습니다. 그중에 '카테고리 III'는 나치의 입장에서 볼 때 '개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수감자'들을 가두는 곳이었습니다. 절멸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은 살아서 나갈 희망 없이 문자 그대로 노역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죠. 참고로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수용소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치의 입장에서 '부담되지만 재교육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카테고리 II 수용소로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가 대표적입니다. 나치의 입장에서 '개선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를 수용한 카테고리 I 수용소로는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대표적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가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을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겠죠.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영화와 책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는 1941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된 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신원확인국의 사진사로 일했습니다. 수용소에 수감자가 들어오면 머그샷처럼 수감번호를 들고 신원 확인을 위한 사진을 찍게 되는데, 프랑시스코 부아가 바로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원만한 사교적 성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나치 장교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남다른 사진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신원확인국에서 일하는 도중 그는 나치의 충격적인 만행을 목격하게 됩니다.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다 죽은 사람이나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 나치의 앞잡이)나 나치 친위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마치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거나 사고사, 자살 등으로 조작한 사진을 발견한 겁니다. 나치는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사진술을 이용하여 교묘히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각종 일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에 동원되어야 했던 프랑시스코 부아는 진실을 은폐하는 사진들의 원본 필름을 외부로 반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나치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서였죠. 그를 중심으로 수감자들은 2만 장에 달하는 필름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나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수용소 밖으로 내보냅니다. 강제수용소가 해방된 이후 프랑시스코 부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재판인 뉘른베르크 공판에 증인으로 나서서 빼돌린 필름을 증거로 나치의 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합니다.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이 장면을 담은 기록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이 납니다. 손가락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하는 사람이 바로 프랑시스코 부아입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인 쉰들러가 자신의 공장을 통해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다면, 프랑시스코 부아는 사진사로 일하던 보직을 이용해 나치의 만행을 담은 원본 필름들을 빼돌렸습니다. 그의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은 원작인 그래픽 노블과 넷플릭스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생각비행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영화 이후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어 무척 흥미롭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넷플릭스 영화 속에 나오는 프랑시스코 부아는 영웅적인 주인공처럼 부각됩니다. 용감하고 선한 마음을 품은 주인공으로서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나치의 만행을 폭로함으로써 정의를 이룬다는 클리셰처럼 말이죠. 하지만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주인공의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려 하기보다 더 큰 그림을 보여주려 합니다. 역사적으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위키백과

 

그 발단은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 17일 프랑코의 쿠데타로 시작되어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난 전쟁입니다. 반란군인 우파가 이끄는 프랑코 측과 좌파 인민전선 정부 측 사이에 발발한 내전으로, 우파와 프랑코의 독재로 끝이 나죠. 스페인 내전은 시기상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대리전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 내전 당시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프랑코를 지원했고, 소련과 각국의 의용군은 공화파인 인민전선을 지원했습니다.

 

Francisco Franco Bahamonde / 출처 - 위키미디어

 

종군기자의 대부인 로버트 카파, 《어린 왕자》의 작가인 생텍쥐페리, 《노인과 바다》의 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1984》의 작가인 조지 오웰 등 수많은 지식인이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참전했습니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험을 통해 대표작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중에 압권은 피카소의 대표작인 〈게르니카〉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에서 벌어진 학살을 표현하고 있죠. 수많은 의용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의 결과는 나치 독일과 손잡은 프랑코 독재정권의 성립이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느꼈던 절망감을 알베르 카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 위키미디어 공용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_알베르 카뮈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진 일을 도왔고 신문기자로서 사진을 찍었던 그는, 자신의 고향인 카탈루냐를 위해 인민전선 쪽에서 참전했다가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귀결되자 국적을 상실하고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던 스페인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치에 대항하다 붙잡혀 결국에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게 됩니다. 프랑시스코 부아가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가게 된 이유, 수용소 내 신원확인국에서 일하게 된 경위, 사진사로서 나치의 만행이 담긴 필름을 빼돌린 일 등 이 모든 것을 스페인 내전이라는 배경을 통해 이해하지 않으면 실존 인물인데도 작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낸 존재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프랑시스코 부아는 스페인 내전을 촬영한 종군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처럼 생각하며 수용소에서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Magnum Photos / © Robert Capa ©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스페인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기교가 필요 없다. 카메라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스페인 자체가 사진이고, 당신은 그저 찍기만 하면 된다.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_로버트 카파

 

좌파 인민전선에 참여했던 프랑시스코 부아는 공산당원으로서 신념이 매우 투철했습니다. 나치의 필름을 빼돌리는 과정에서 그의 신념과 다른 당원 동지들의 협력은 아주 주요하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영화만 보신 분은 만듦새가 성글다고기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보면 여러 장면이 뜬금없어 보이고 산만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반면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그래픽 노블의 특성상 사료와 해설, 풍부한 역주를 통해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책과 영화를 함께 본다면 스페인 홀로코스트의 실제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백미는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영웅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해방 이후의 내용입니다. 영화는 프랑시스코 부아의 영웅적인 면모를 기록 영화의 한 장면을 써서 부각하며 끝맺고 있지만, 사실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에 증인으로 참석한 그가 느낀 절망감은 책을 통해서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은 보면 볼수록 한국전쟁을 생각나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놓고 인트로와 아웃트로로 수미쌍관을 이룬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한 국가의 내전이었지만 수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국제 대리전 성격이 강했던 상황, 국민의 염원과 달리 외세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않았거나 국민들의 뜻을 무시한 것도 유사합니다. 스페인을 독재정권에서 해방하기를 거부한 연합군, 통일 정부로서 선거를 치르기를 앙망했던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남한 단독 선거로 정부가 수립되었던 모습도 겹쳐 보입니다. 두 내전의 결과가 결국 독재정권으로 귀결되었다는 점까지 비슷하죠. 스페인에는 프랑코,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그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무국적자 신분의 프랑시스코 부아의 처지는, 해방이 됐건만 일본은 물론 남북한 어디서도 제대로 된 환영을 받지 못했던 조선적(朝鮮籍) 사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출처 -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서두에 언급했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별다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스페인과 한국의 역사에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를 더욱 뜻깊게 보기 위해서라도 책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영화만 보는 것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15년 동안 갇혀 있었던 부분만 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대사로 표현되었다시피 〈올드보이〉의 핵심은 15년 동안의 감금이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시스코 부아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페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무국적자로서 어떤 나라의 환대도 기대할 수 없었던 스페인 수감자들의 절망감을 이해하는 것이 책과 영화의 핵심입니다. 그래픽 노블을 통해 스페인 내전이라는 그 배경에까지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보다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최다 세계기록유산 보유국입니다.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많은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역사로 이어진 듯합니다. 지난 6월 25일 광주시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밝혔습니다. 정부 지원 없이 민간 NGO가 주도적으로 추진해 달성한 성과이기에 그 의미가 큽니다.

 

최근 정부는 일본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취소를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군함도로 알려진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의 섬 하시마는 1940년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가 100명 이상 숨진 곳이죠. 일본은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 왜곡은 어떤 이유로든 허용되어선 안 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치의 참혹한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진사 한 명을 소개할까 합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신간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의 주인공인 ‘프랑시스코 부아(Francisco Boix)’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영화를 보실 수 있는데요, 그래픽 노블인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가 원작입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절멸될 수감자들”

1938년 3월 독일 제3제국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지 며칠 후, 새 정권은 오스트리아에 집단수용소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한다. 나치 친위대는 포로의 수가 급증할 것을 내다보고 수용소 추가 건설을 고려했다. 동시에 나치 친위대 사령부는 건설자재 산업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렇게 친위대는 강제수용소 확장을 정당화하고 수용소 내 활용 가능한 노동력을 독점함으로써 친위대의 재정을 튼실히 하고자 했다.


친위대는 그들의 경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용소 부지를 물색하는 데 착수하여 마침내 화강암 채석장을 인근에 둔 마우트하우젠(Mauthausen)과 구젠(Gusen)을 낙점했다. 나치 친위대 기업은 독일 제3제국의 화려한 기념물과 건물에 필요한 건축자재를 수용소 포로들을 동원해 채석하여 공급할 계획이었다.


1938년 8월 8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포로를 태운 첫 기차가 마우트하우젠에 도착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수감될 수용소 건설을 위해 노동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화강암 채석장 개발과 확장에도 동원되었다. 수감자들은 극도로 열악한 조건 아래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적합한 도구나 작업복조차 받지 못했고, 늘 부족한 음식에 시달려야 했으며,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받지 못해 숱한 질병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심각한 사고의 위험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고된 노역 과정에는 친위대의 끊임없는 폭행이 이어졌다.


1938년 설치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는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약 33만 명이 수감되었으며, 그중 12만 명 이상이 죽었다. 마우트하우젠은 나치에 의해 기획된 절멸수용소(Extermination camp)였다. 이 명칭은 공식적으로 존재한 적은 없으나, 실제 역할은 다른 강제수용소와 명확히 구분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6개의 강제수용소는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설립했다. 이곳은 범죄 행위에 대해 형벌을 주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전쟁 중 절멸 정책을 일괄 마무리하는 곳이었다. 희생자의 시체는 통상 소각 처분 내지 집단 묘지에 묻어 처리했다.
1941년 1월 2일, 당시 나치 독일의 국가보안본부 수장인 하이드리히(Heydrich)는 25개에 달하는 강제수용소를 3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카테고리I 수용소는 나치의 입장에서 개선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위한 수용소였다. 다하우, 작센하우젠, 아우슈비츠 등이 그런 곳이었다. 카테고리II 수용소는 부담스럽지만 재교육 가능성이 있는 수감자들을 위한 수용소였다. 부헨발트, 플로센뷔르크, 노엔가메, 비르케노 등이 그런 곳이었다. 카테고리III 수용소는 교화 가능성이 없는 수감자들이 수용되었고, 그들은 노동을 통해 절멸될 운명이었다.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 마우트하우젠, 구젠 등이 그런 곳이었다.

 


“나치의 만행을 폭로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프랑시스코 부아”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입은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프랑코와 히틀러가 조기에 맺은 동맹을 참작할 때 말이다. 그러나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안티-파시스트 군대가 유럽의 다른 곳보다 일찍 조직된 스페인의 복잡한 실상을 드러낸다.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대항하여 무기를 든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1936년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의 지지를 받은 프랑코 장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신속한 귀환을 희망하며 프랑스로 대거 망명했는데, 그 수가 50만 명에 달한다.


안전한 피난처로 굳게 믿었던 나라에서 스페인 공화파 망명자들은 자신들을 “달갑지 않은 빨갱이”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야 했다. 남자들은 프랑스 군대, 외인부대, 보병대대 또는 군사 시설인 외국인 노동자 회사(CTE)로 들어가도록 강요받았다. 공장, 농장, 군사방어 시설의 건설 현장에서 하급 노동을 수행하면서 그들은 “삽과 곡괭이 부대”가 되어갔다. 1940년 5월 독일 부대의 공격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바로 이런 회사에서 일한 스페인 망명자들이었다. 생존자들은 흩어져 도주하거나 스위스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계속하다가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었다. 약 1만 명에 달하는 이들을 비시정부(Vichy政府)는 프랑스 군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포기해버렸다. 스페인 정권도 히틀러와 협상하면서 마찬가지 태도를 취했다. 결국 고국인 스페인으로도, 망명지인 프랑스로도 갈 수 없었던 이들은 대부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0년 8월 시작된 강제수용은 1944년까지 이어졌다. 대략 1만 명의 공화파 사람들이 공화정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파시즘에 맞서 투쟁했다는 이유로 나치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1941년 1월 27일 1506명이라는 가장 큰 이주 대열 속에 한 명의 사진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프랑시스코 부아(Francisco Boix)’다.


초기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스페인 포로들에게는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수용소 내 주요한 보직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더 좋은 식단과 생존의 기회가 보장된다는 의미였다. 미용사, 음악가, 소목장 등의 직군에서 일하면서 이들은 수용소에서 비교적 오래 존속할 수 있었다. 수용소를 지휘하는 나치 친위대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부리는 편이 유용하다고 여겼다. 이런 특별한 혜택을 받은 수감자들을 ‘프로미넨텐’이라고 불렀다.


프랑시스코 부아는 스페인 수감자들인 동료들에 의해 프로미넨텐으로 연결되었으며, 수용소 내에 있던 신원확인국에서 일하며 필름을 현상하는 일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나치에 의해 은밀하게 작동하는 끔찍한 체계를 목도한다. 프랑시스코는 신원확인국의 책임자였던 파울 릭켄을 도우면서 그가 꾸미고 있는 일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파울 릭켄은 나치 친위대나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 나치의 앞잡이)에 의해 살해된 포로들의 시신을 자살이나 사고사로 위장했다. 때로는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 죽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시신의 자세를 바꾼 다음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파울 릭켄은 노출, 초점, 구도 등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촬영했다. 그는 단순히 시체의 모습을 찍는 게 아니라 마치 자연의 아름다움을 불멸화하는 것처럼, 영상의 구성과 원근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자신만의 미적 감각을 총동원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프랑시스코 부아는 스페인 수감자들의 지하 레지스탕스 한가운데에서 동지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나치의 범죄행각을 드러내고 나치 최고 수장들을 고발하는 데 증거가 될 필름을 빼돌리려는 은밀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이 계획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선 대장정의 출발일 뿐이었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한 인물의 영웅담을 기록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홀로코스트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스페인 생존자들의 운명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픽 노블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실화이며, 책의 후반부는 사료를 중심으로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참혹한 삶을 증언하고 있다.  


프랑시스코 부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빼돌린 필름으로 나치의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수많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역사적으로 조명되었다. 그의 생생한 증언은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며, 그가 남긴 기록 역시 불멸할 것이다.


 

 

 

▌만든 이들

그림  페드로 J. 콜롬보(Pedro J. COLOMBO)
페드로 콜롬보는 1978년 스페인 그라노예르스(Granollers)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만화 주인공인 스파이더맨(Spider-Man)이 되기를 꿈꾸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뒤 자신의 영웅과 최대한 가까운 것(만화)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998~2000년 바르셀로나의 호소 만화 학교(Éole de bande désiné Joso)에서 제9의 예술의 역사와 자신이 그릴 만화의 기본을 공부했다. 동료와 만화가 친구들의 우정과 자기초월의 경향에 힘입어 프랑스의 만화 전문 출판사인 다르고(Dargaud)의 시리즈물인 《셋...그리고 천사(Trois...et l’ange)》 세 권을 그리는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합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경력을 다져왔다.
2001년에 배우자이자 자신의 채색 전담이 될 아인차네(Aintzane)를 만났고, 현재 두 사람은 빌바오(Bilbao)에서 살고 있다. 시나리오작가인 살바 루비오와 함께 롱바르 출판사에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를 출간했다.

 

채색  아인차네 란다(Aintzane Landa)
아인차네 란다는 1980년 스페인 바라칼도(Barakaldo)에서 태어났다. 배우자인 만화가 페드로 콜롬보가 그린 작품의 채색을 맡고 있다.
유럽에서 명작 만화인 《마팔다(Mafalda)》, 《탱탱(Tintin)》, 《아스테릭스(Astéix)》를 보며 자랐고, 지금도 손에 잡히는 작품들이면 죄다 읽는다.
그라나다(Granada)에서 페드로와 정착하면서 채색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기에와 프랑스 출판사의 만화 시리즈물 채색을 다수 담당했으며, 페드로 곁에서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채색 작업을 했다.
현재 페드로와 함께 빌바오에 살고 있으며, 여가를 이용해 아미구루미, 수첩, 레터링, 스크랩북 등을 만든다.

 

글  살바 루비오(Salva Rubio)
살바 루비오는 1978년 스페인 마드리드(Madrid)에서 태어났다. 시나리오작가, 작가, 역사가다.
역사물 기획이 전문으로, 스페인작가출판협회(SGAE)가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 ‘Julio Alejandro’의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며 많은 상을 받았으며, 2010년에는 그의 단편영화 중 하나가 스페인 세자르상에 해당하는 고야상(los Premios Goya) 예선에 진출했다.
마드리드 카를로스Ⅲ대학에서 영화와 텔레비전 시나리오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단편영화뿐 아니라 장편 애니메이션 〈딥(Deep)〉(2017) 등 스페인 소재 영화제작사의 다양한 기획에 참여했다. 작가로서 다양한 창작물과 각색 작품을 발표했으며 서사에 대한 강의도 한다.
《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는 《모네, 빛의 노마드(Monet, Nomade de la lumièe)》에 이어 만화 시나리오작가로서 두 번째로 출간한 그래픽노블이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삽화가이며 여가를 이용해 재즈 트럼펫 연주를 한다.

 

옮김 문박엘리
서울에서 자라 학교를 다녔으며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다.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했으며 일반회사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다. 인간과 자연과 우주 만물의 연계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옮긴 책으로 《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 《생물의 다양성》이 있다.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 잘 쇠셨는지요? 가족, 친지를 만나 쌓인 회포도 풀고, 아이들의 재롱도 보면서 정을 나누는 명절에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평소와 다른 기름진 식단과 과식 때문에 배탈이 나기 쉽기 때문이지요. 설과 한가위 다음 날에 가장 잘 팔리는 약이 소화제이기도 합니다. 먹을 게 없어 명절 때만 되면 배가 터지도록 먹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아무래도 설의 분위기와 오랜만에 모여 같이 밥을 나누는 정 때문에 평소와 달리 과식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과식이나 소화불량으로 약을 찾는 손님들 때문에 약방은 설 특수를 맞기도 한답니다. 오랜 세월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소화제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궁중 무관인 선전관(오늘날의 대통령 경호관) 출신 노천 민병호에 의해 1897년 탄생한 활명수는 한국 최초의 브랜드이자 최장수 의약품이기도 합니다. 활명수가 세상에 나온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약은 구하기가 어려워 급체나 심한 설사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활명수는 조선 민중의 아픈 속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 그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조부모님 때부터 마셔온 활명수는 구한말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역사와 궤를 같이했습니다. 오늘은 120년간 우리 곁에서 아픈 속을 달래준 활명수를 통해 지난 역사를 한번 돌아볼까 합니다.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

 

 

활명수의 발상지, 정동


정동과 서소문 일대는 한국 최초(最初)이자 최고(最古) 브랜드인 활명수의 발상지입니다. 정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급변하는 한국 근현대사가 오롯이 압축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비롯한 일제의 무력시위가 진행된 가운데 아관파천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 또한 정동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2대 주인인 민병호의 아들 민강의 지원 아래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결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연통부가 비밀리에 설치되기도 했죠.

 

서울연통부 기념비

 

활명수의 아버지 민병호는 고종의 어의이자 제중원 의사였던 알렌과의 인연으로 서양의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에서 새롭게 알게 된 서양의학과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궁중 비법과 한의학 지식을 융합하여 활명수를 만들어냅니다. 최초의 현대식 국립병원이었던 제중원 이야기가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활명수'의 탄생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드라마 29회에 등장하는 '박하맛 나는 소화 물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실제 활명수 탄생 이야기를 드라마의 배경에 맞춰 각색한 것이긴 하지만, 활명수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비교적 충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으로 다뤄질 정도로 의미 있었던 최초의 서양식 국립 의료기관 제중원은 조선 사람과 서양의학이 만나는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만남과 관계 속에서 탄생한 활명수는 한방과 양방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낳은 옥동자와 같았죠. 하지만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많은 백성이 본토를 떠나 중국 만주로, 러시아 연해주로, 미주 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갓 태어난 활명수 앞에는 나라 잃은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과 동행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활명수와 조선 독립 그리고 경제자립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 궁궐의 용도를 마음대로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창경원으로 바꾼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일본은 헌병경찰 제도를 시행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잡아들였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민족지사들의 활동을 탄압했습니다. 또한 농업과 상공업 등에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합니다.

 

경복궁의 건물 일부를 허물고 상업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오늘날의 산업박람회)를 개최한 일은 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행사였습니다. 조선 기업인들은 이 공진회 참가를 두고 고민이 컸습니다. 조선에서 벌인 첫 박람회였지만 동시에 일제 식민통치를 만방에 알리는 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밉지만 사업의 홍보와 판촉을 위해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은 공진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마련된 수익금은 그가 설립한 소의학교에 기부했으니 동화약방으로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나름의 방법으로 이용한 셈이죠. 이 공진회를 계기로 조선의 지식인층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독립과 경제자립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민강 사장은 약업으로 이룬 집안의 부를 사회를 위해 사용해왔습니다. 접근성이 좋은 경성부 내의 동화약방 점포는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과 연락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엔 그의 과감한 행동이 기업의 자랑이 되었으나, 일제치하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은 물론 사업과 집안의 몰락을 불사한 용단이었죠. 독립운동에 참여한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회사는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장이 현장을 지키지 못하고 투옥되어 있거나 해외로 나가 있으니 사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죠. 활명수뿐 아니라 동화약방의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활명수의 모기업 동화약방에 큰 위기가 닥친 1920년대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가치만 놓고 보자면 분명 마이너스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를 기점으로 동화약방은 무형의 자산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동화약방이 힘쓰는 노력이 알려지자 해외 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만주, 미국 하와이에서 활명수를 찾는 이가 늘었다는 자료도 있으니까요. 오늘날 활명수 브랜드에 깃든 무형의 자산 가치는 그때 그 시절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활명수,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


조선 유일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 방송국에서 1936년 한 경기가 생중계됐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경기였습니다. 비록 일제 식민치하에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경기였지만, 손기정 선수는 자신을 'Korean'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승 후 작성한 방명록에도 기테이 손이 아닌 ‘손긔정 KOREAN’이라고 써서 떳떳한 조선 남아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힘으로 약소민족을 짓밟고 있던 군국주의에 대한 그만의 저항이기도 했지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후 여러 기업에서 그의 승리를 모티브로 활용해 광고를 했습니다. 동화약방의 활명수도 우승 다음 날인 1936년 8월 11일 《조선일보》에 우승 축하광고를 게재합니다.

 

반도남아의 의기충천

손기정, 남승룡 양 선수 우승축하


건강한 체력, 견인불발하는 내구력에 근원은

오직 건전한 위장에서 배태된다. 

건강한 조선을 목표하고

다 같이 위장을 건전케 하기 위하여

활명수를 복용합시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축하하고 건강한 위장을 위해 활명수를 마시자는 기업 이미지 광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이나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이상 가는 민족적 경사 앞에서 동화약방은 민강 사장이 사망한 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와중에 과감히 축하광고를 실었습니다. 식민지 시절 조선 선수의 세계 제패는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막힌 속을 뚫어주는 청량제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세를 과시하던 히틀러는 3년 뒤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세계를 다시 한 번 참혹한 전쟁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역사는 파국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한여름 시원한 냉수와도 같았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쾌거는 정확히 56년 뒤인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달린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으로 다시 한 번 재현됩니다. 1936년 암울했던 시절 광화문 광장에 모여 손기정과 남승룡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손자, 손녀들이 66년 뒤인 2002년 여름 광화문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을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손기정의 세계 제패를 기념하던 활명수의 광고 문구인 '건강한 체력'과 '건강한 조선'의 꿈은 그렇게 실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활명수 광고 속 전화기와 자동차


1950년 안타까운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는 일은 국가적인 과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수출 전략과 민족 특유의 근면성을 바탕으로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경제개발을 이뤄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정치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경제가 점차 발전하자 우리 정부는 경공업을 넘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이 다 이때 만들어졌죠. 생활수준이 조금씩 향상됨에 따라 나름의 소비문화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자식 교육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에 대한 욕망은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고 계층을 형성함으로써 가치와 부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1960~1970년대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전화기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손에 하나씩 들고 있지만, 그 당시엔 동네에 전화기 한 대 있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전화 신청이 밀려 백색전화 한 대 값이 250만 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유할 수 있어 사고팔 수 있는 백색전화는 투기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80킬로그램 쌀 한 가마니 가격이 6만 3000원 정도였고 서울 시내 집 한 채 값이 250만 원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전화기 값이 비쌌는지 알 수 있죠. 


"하루가 끝나도 내일의 일이 또 남아 있습니다. 전화연락할 일, 만나야 할 중요한 약속시간 때문에 대식가로서 또는 애주가로서 먹고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다?"라며 활명수를 권하는 광고가 신문에 게재됩니다.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였습니다. 1968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활명수 광고에 처음으로 다이얼 전화기 그림이 등장하는데요, 이는 아직 전화기가 일반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전화기 옆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익숙한 전화 그림을 넣은 것이었죠. 활명수의 전화기 그림 광고에서 현대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문명의 이기인 전화기를 사용하는 타깃 고객인 직장인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 동화약품의 고민의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70년 8월 17일 《동아일보》 활명수 광고에는 자동차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1903년으로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포드 자동차를 들여온 것이 처음이었다고 하지요. 선택받은 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것. 당시 자동차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 우리나라는 미군이 남기고 간 자동차의 부품을 활용하여 조악한 디자인과 성능이긴 해도 운행에는 문제가 없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시발(始發)’ 즉,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죠. 이 시발 자동차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언젠가 차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1968년 전화기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와 1970년 자동차가 등장하는 활명수 광고는 당시 보통 사람이 소유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가치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화기와 자동차가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활명수 광고에 담겨 있던 이상이 실현된 것이죠.  


 

과음, 과식의 시대에도 활명수


19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농업 생산성이 향상하면서 어느 정도 먹을거리 문제가 해결되자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것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던 고단백 고칼로리 음식을 평소에 먹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과음과 과식을 하는 이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활명수도 이런 시대적 변화에 발맞췄습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과음'과 '과식'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5월 13일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과음 과식을 하지 맙시다!"라는 캠페인성 광고가 실립니다. 광고 문구를 보면 "언제나 튼튼하고 건강한 위를 위해서는 위에 부담을 주는 과음, 과식을 피하고 항상 알맞는 양의 음식을 규칙적으로 드시도록 하십시요.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반드시 규칙적인 식생활만을 하기란 어려운 일! ― 뜻밖의 과음, 과식을 하셨을 때는 곧 알파활명수를 복용하십시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현대인의 과음, 과식에 적절히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활명수 복용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과음, 과식 그리고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경제 발전으로 예전보다 풍요로워졌지만 물질적 풍요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바쁜 생활 속에서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한 끼 식사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2010년에 이르러 활명수는 가족식사를 제안하는 '맑은 바람 캠페인'을 제안합니다. 광고는 "하루 한끼, 가족이 밥상에서 만나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출처 - 동화약품

 

한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소비자들은 편의점에서도 간편하게 활명수를 구매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 2011년에 드링크제, 액제 소화제, 외용연고 등 48개 품목의 일방의약품을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의약외품으로 지정합니다. 소비자의 구매 편의성에 대한 요구가 이어지자 동화약품은 이를 수용하여 의약외품으로 전환된 제품 중 부채표 '까스활'을 출시합니다. 까스활의 탄생은 편의점과 대형마트의 대중화로 인한 소비 형태의 변화와 이에 따른 액제 소화제 시장의 트렌드와 현행법에 맞게 활명수의 브랜드를 적절하게 공유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죠.

 

활명수 하면 자연스럽게 부채표 상표가 떠오릅니다. 부채표는 활명수의 초창기부터 함께했습니다. 부채표 상표는 활명수 병 라벨에 브랜딩되어 100년 이상을 우리와 함께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활명수 하면 곧 부채표를 생각하는 것이죠. 동화약품이 최근에 출시한 미인활명수의 병 디자인을 보면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위에 새겨진 부채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디자인 안에 담긴 활명수의 가치를 음미합니다. 활명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소비자의 요구와 감각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제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10년 뒤 20년 뒤 활명수의 병과 라벨 그리고 부채표 상표는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출처 - 동화약품

 

2016년 올해로 딱 119년.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겪어온 활명수의 나이입니다. 근 120년간 활명수는 한국인의 지친 속을 달래주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 중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소비자의 99.8퍼센트가 활명수를 알고 있으며 연간 1억 병이 생산됩니다. 한마디로 활명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입니다. 활명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혼란과 전쟁,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 그리고 민주화와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주었습니다.

 

1897년 이래 활명수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처음 등장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활명수는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할 것입니다. 활명수가 미래가치를 담아 소비자와 사회에 더 많은 일을 할 때입니다. 120년간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과 동고동락한 활명수의 이야기를 담은 책, 《대한민국, 활명수에 살다》에 오늘 전하지 못한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꼭 읽어주세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