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학살자 전두환이 불구속 기소되었습니다. 회고록을 통해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기총소사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광주사태 당시 헬기의 기총소사는 없었으므로 조비오 신부가 헬기사격을 목격했다는 것은 왜곡된 악의적인 주장이다. 조비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기술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었던 것입니다. 5.18 특조위의 조사 결과 광주 전일빌딩에 남은 총알 자국,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 등을 통해 헬기 사격이 실재했음이 이미 밝혀졌습니다. 이 결정적 증거들은 검찰이 기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출처 – KBC 광주방송


SBS 탐사보도팀은 미국 국무부 비밀 전문을 통해 최종 진압 작전이 누구의 지시였는지, 광주에 북한군이 투입되었다는 설을 누가 처음 퍼뜨렸는지 밝혀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전두환이었습니다. 미국 시간으로 1980년 5월 25일 오전 9시 머스키 당시 미 국무장관이 한중일 대사관 등에 보낸 비밀 전문에는 '군의 실력자 전두환 장군이 군사 작전이 필요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협상 시도가 실패하면 진압 작전이 시작될 예쩡인데, 이 경우 합참의장이 미국에 먼저 알려주기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5.18 기간 중 한국 문서에는 전두환이란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미국 비밀 문서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고 결정적인 증거라는 점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출처 - SBS


비밀 문서를 보면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모르는 척하던 미국이 당시 전두환 신 군부와 학살에 대해 조율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계엄군의 강경 진압 문제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에 관해 성명을 내면서 신군부와 사전에 상의했던 것입니다. 미국 문서에서는 최초 사망자가 농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당시 광주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거의 5분, 10분 단위로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해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 SBS


전남도청 집단 발포가 있었던 다음 날인 1980년 5월 22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미국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을 보면 23일 발행되는 한국 신문에 실릴 수 있도록 22일 국무부가 성명을 발표하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전문에는 신군부와 청와대가 성명 초안에 동의하며 이를 환영했다고 기록돼 있죠. 미국이 나서서 학살을 막아줄 것이라 믿었던 당시 광주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처 – KBS


KBS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암매장에 관한 군 문건을 입수했습니다. 당시 출동 부대에 가매장 장소 보고를 지시했고 수색 결과를 실제로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5.18 직후 암매장 처리를 위해 시신 수습반을 운영했다는 증언은 있었지만 암매장 장소를 보고하라고 지시한 정황이 문건으로 확인된 건 처음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군부의 입장과 달리 5.18 당시 군은 암매장 사실을 인지했고 수색 결과까지 보고 받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군 기록에 대한 추가 조사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출처 – MBC


이처럼 명명백백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은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광주 시민들과 민주화 운동의 의인들을 모욕하는 회고록까지 냈으니 이를 묵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기입니다. 개헌을 위한 헌법 전문에 우리나라 민주화의 핵심적 사건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실린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죠. 전두환에 대한 단죄를 더는 미룰 수도, 미뤄서도 안 될 일입니다.

평창동계올리픽이 한창이던 지난 2월 12일 생각비행은 〈5.18 진상규명특별법 처리, 동계올림픽 중에도 관심 가져야〉라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5.18 특별법이 의결됐습니다. 본회의 재석 의원 202명 중 찬성 158명, 반대 15명, 기권 29명이었습니다. 강원랜드 채용 비리로 인한 권성동 법사위원장의 사퇴문제 때문에 여야가 충돌해 2월 임시국회 처리에 많은 사람이 걱정했는데 다행히 통과된 것이죠. 

 

출처 - 연합뉴스


5.18 특별법은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별도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자는 취지입니다. 그러므로 특별법에 따라 구성되는 진상조사위는 5.18 당시 자행된 군사독재 정권의 민간인 학살과 진실 은혜 의혹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게 됩니다. 조사위는 국회의장 추천 1인, 여당 추천 4인, 야당 교섭단체와 비교섭단체가 추천하는 4인으로 구성되는데요. 최장 3년을 활동기한으로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조사 과정에서 범죄 혐의가 포착되면 검찰총장에게 고발하도록 하고 수사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출석이 필요한 사람이 정당한 이유 없이 2회 이상 불응할 경우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압수수색 영장 청구 의뢰는 개인 또는 기관 등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이를 인멸하거나 은닉, 위변조하려는 혐의가 현저할 때만 가능하도록 했고, 동행명령장도 과태료 부과 외에는 형사처벌이 되지 않아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출처 - 프레시안


법안의 명칭이 밝히듯 5.18 당시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사망, 상해, 실종, 암매장 등의 광범위하고 실체적 진상 규명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광주 시민을 향해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지 최초 발포와 발포 명령자 규명도 조사 범위에 있습니다. 이미 논박당하고 심지어 전두환조차 부정한 바 있는 북한군 개입설의 진위 여부도 자유한국당의 억지에 의해 들어가 있긴 합니다.


출처 - 뉴시스


아시다시피 지난 2월 7일, 국방부는 38년 만에 5.18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또 5.18 당시 공군은 제10전투, 제3훈련 비행단에서 전투기, 공격기에 폭탄을 장착한 채 대기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실제로 광주행 폭격을 검토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이런 정도의 사실도 국방부가 사죄를 위해 선선히 인정한 건 아닙니다.


출처 - 뉴시스


특조위가 62만 쪽에 이르는 자료를 수집 분석했고, 당시 광주에 출동했던 190개 대대급 이상 군부대 및 관련 기관을 방문·조사했으며, 군 관계자들과 목격자 등 총 120명을 조사해 이룬 기적 같은 성과였습니다. 국방부는 군에 불리한 자료를 의도적으로 은폐·왜곡했고 마이크로필름으로 전환하며 보존 연한의 경과를 핑계로 자료를 폐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특조위는 군 자료 원본을 찾기 어려웠고 일부 기관의 비협조와 강제 조사권이 없는 상황에서 조사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출처 - JTBC

 

5.18 특조위가 밝혀낸 헬기 사격 사실을 근거로 광주지방검찰청은 지난 2월 22일과 27일, 전두환에게 검찰에 나와 조사를 받으라고 통보했으나 전 씨는 소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전 씨는 자신이 헬기 사격에 관여한 적이 없고 당시 기록을 토대로 회고록을 썼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취지의 진술서를 제출했습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소환에 세 차례 불응하면 검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진술서 검토를 마친 뒤 다시 소환통보를 할지 결정할 예정입니다.

 

출처 - 한국뉴스투데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전두환 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었음에도 두 번씩이나 검찰소환을 거부하고 있다"면서 "그 어떤 참회나 반성도 없이 여전히 자신을 미화하고 광주의 피눈물을 외면하는 행태에 말문이 막힐 정도"라며 "전두환 씨가 저지른 일은 명백한 시민 학살"이라 비판했습니다. 아울러 추 대표는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서 탱크와 헬기를 내세우고 군인들을 동원해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군사작전을 펼친 해방 이후 최악의 권력형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며 "밝혀진 진실을 토대로 지난 28일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위해 5.18 특별법을 통과시켰다"고 말했습니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5.18 특별법에 따라 진상조사위가 발족하면 조사에 대한 제약이 줄어드는 만큼 5.18 광주의 실체에 바짝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철저한 조사와 진상규명을 통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죄악상을 온전히 드러나길 기대합니다. 더 많은 국민의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의 적폐가 하나하나 드러나는 가운데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큰 적폐라고도 할 수 있을 전두환의 5.18 관련 범죄도 차례차례 밝혀지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SBS 뉴스에서는 지난 37년 동안 기무사에 감춰져 있던 5.18 민주화운동 사진첩 중 일부가 공개되었습니다.


출처 - SBS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운동 가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증거물로 찍거나 모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전남대 복학생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모자로 몰렸던 정동년 전 광주 남구청장과 홍남순 변호사, 정상용 전 국회의원 등이 수의를 입고 있는 모습 등이 담겨 있습니다. 5.18 직후 광주 상무대에서 열린 군사재판 장면입니다. 당시를 회상한 사람들에 의하면 군사재판의 공포 분위기로 변호사가 변호를 할 수 없었고 내란 혐의 판결을 해야 했던 재판부 가운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첩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주범으로 지목한 이른바 내란 범죄 개요도도 실려 있었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이 5.18을 내란으로 폄훼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고자 했던 사진들이 이제는 오히려 당시 시대의 억울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출처 - 광주일보


이와 함께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대표적 사건이었던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 명령자는 중령이었던 조창구 제11공수부대 63대대장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995년 작성된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의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문서에 따르면 조창구가 대대장 지프에 보관하던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지급하고 위급 시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즉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되고 실탄이 지급되었다는 것은 발포 허가가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조창구는 이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지만 2006년 서훈이 취소된 바 있죠. 이에 앞서 20일 밤 광주역 3공수 집단발포 명령자는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이었습니다.


출처 – JTBC


여기에 더해 전두환 정권과 뒤이은 노태우 정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뜯어고쳤습니다. 특히 1988년 청문회를 앞두고 당시 보안사는 511분석반을 설치하고 철저히 은폐공작에 나섰습니다. 511분석반은 발포명령자, 대량살상무기 사용, 사망자 수까지 은폐 왜곡하기 위해 각종 지시를 내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와 1995년 검찰 조사, 2007년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조사 때 511분석반에 의해 조작된 자료가 제출된 바 있습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최초 사격에 관여했고 발포 통제를 한 사살이 그 당시에 밝혀졌더라면 직속상관인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신군부 핵심 세력으로 5.18 당시 헬기까지 타고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수시로 접촉한 정황으로 볼 때 최종 발포 명령자 규명이 가능할 수도 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출처 – 뉴시스


늦긴 했으나 양심선언을 하는 군인과 경찰들의 증언이 이제라도 나오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5.18기념재단은 지난 21일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교도소 일원에서 3공수여단 11대대 부대대장 출신인 신순용 전 소령으로부터 5.18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민간인 희생자 암매장에 관여했다는 진술을 청취했습니다. 또한 사병으로 복무한 유모 씨 등 추가 제보자가 제시한 암매장 의심 지역들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날 신 소령은 옛 교도소를 찾아 암매장 추정지를 지목했습니다.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옛 교도소 서쪽 담장 주변으로 5.18 이후 폐수처리시설이 증축된 곳입니다.

 

군 기록에 따르면 민간인 27~28명이 5.18 당시 옛 교도소 일원에서 숨졌는데 민주화운동이 끝나고 임시매장된 형태로 찾은 시신은 11구에 불과했습니다. 지난 8일 유해 발굴 작업으로 암매장 추정지에서 배관 8개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암매장 시신의 자취를 찾고 있습니다만, 1980년 이후 통신 배관과 상하수도 배관 등등 4번가량 이곳에서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보아 유해의 흔적이 이미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땅속에 묻힌 진실을 찾아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한편 5.18과 관련해 경찰이 당시 현장 경찰관들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처음 입장을 냈습니다. 광주 치안에 문제가 없었음에도 계엄군의 과격 진압과 발포가 이뤄졌고, 이를 왜곡하기 위해 경찰 내부 문서까지 조작했다는 겁니다. 5.18 직후 보안사에서 보존한 전남 경찰국 치안일지에는 군부의 주장처럼 시민들이 먼저 나주 경찰지서에서 총기를 탈취하고 장갑차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주 남평지서 경무과장의 감찰 진술서에는 집단 발포 이후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시민들이 몰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군부가 먼저 시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경찰은 당시 현장에 동원되었던 기동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심지어 야유회를 갈 만큼 치안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군이 개입했다거나 시민군이 약탈과 강도를 하는 무법천지였다는 보도는 신군부에 의한 왜곡된 발표였음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경찰은 계엄군의 과격 진압을 제지하지 못하고 그동안 침묵해온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출처 - SBS


이제 남은 것은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독재의 잔당들과 아직도 적폐를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우리나라 군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꼬인 현대사를 푸는 것은 5.18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국가의 폭력에 의해 더는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5.18의 진실을 캐내기 위한 관심과 행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19일 오후 트럭을 타고 羅州로 대피했다. 20일 光州의 세무서와 MBC KBS가 불타고 시민들이 광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광주로 들어갔다. 시내 곳곳마다 검은 연기가 솟아 올랐고 군용트럭에 탄 시민들이 애국가와 반정부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군용트럭을 타고 시내를 돌아봤는데 갑자기 월산동로터리 부근에서 헬리콥터가 나타나 사격을 가했으며 길가의 한 학생이 쓰러졌다.”

(광주사태부상자회 이광영 부회장)


“한편 금남로에서는 도청 부근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며 MBC가 있는 제봉로 근처에서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금남로 주변의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일시에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안으로 숨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희생되었다.”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처 - 5.18기념재단


군부 독재가 자행한 자국민 학살로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억되는 1980년 5.18민주화항쟁. 전두환 등 지휘자의 부정과 은폐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정황이 담긴 증언과 기록을 보다 보면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그것도 적이 아닌 자신들이 지켜야 할 국민을 향해 어떻게 군인이 총질할 수 있는지 억장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확실하게 인정되지는 못했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이 헬기에서 기총소사했다는 광주 시민들의 증언과 기록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12.12 관련 재판에서도 군 당국 역시 헬기나 탱크 등의 투입은 없었다고 잡아뗐죠.


출처 - SBS


그런데 지난 12월 15일 5.18기념재단의 발표에 의하면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군요. 전두환 정권이 시민을 학살하는데 헬기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 말입니다. 지난 13~1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광주 전일빌딩 10층 내부에서 총탄 흔적 130여 개를 육안으로 확인했습니다. 총탄 흔적은 1980년 5월 당시 전일방송국이 있던 10층 내부의 기둥에서 50여 개, 천장에서 30여 개, 바닥에서 50여 개 등 총 130여 개가 나왔습니다. 국과수는 총탄 흔적의 방향이나 각도 등을 고려할 때 공중에 떠 있는 헬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탄흔 크기로 볼 때 헬기에 달린 기총보다는 작은 5.56mm 총탄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헬기에 탑승한 계엄군이 소총으로 난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1980년 5월 당시 금남로 주변에 전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으므로 계엄군이 헬기를 동원했다는 것에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출처 - 뉴스1


1980년 5월 당시 옛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소유의 건물이었던 전일빌딩 10층은 전일방송 영상 데이터베이스 사업부가 사용했는데, 당시 전일빌딩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언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광주공원, 사직공원, 월산동 인근에서 헬기 사격에 대한 증언이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희생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5.18 이후 10층은 사무실을 비웠다고 합니다. 그 후 쭉 공실이었던 이 건물에서 무더기 총탄 흔적이 나올 거라곤 광주시나 5.18 단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총탄 자국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출처 - 한겨레


계엄군이 헬기 사격 요청을 했다는 내용이 담긴 군 보고서가 최근에 확인된 바 있습니다. 전 5.18유족회장인 정수만 5.18연구소 비상임연구원은 1980년 9월 5.18 계엄군이었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육군본부에 제출한 '광주 소요사태 분석 교훈집'에 헬기 사격 요청 내용이 있다고 지난 18일 밝혔습니다. 보고서에는 항공기임무 항목에 '무장 시위 및 의명 공중화력 제공' 요청이 있을 시 공중 사격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공중 사격 지시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뤄졌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군은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 의혹을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해왔으나 최근 드러난 증거를 통해 5.18 민주화항쟁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군사 독재의 책임을 더 깊이 물을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문제는 전일빌딩의 보존 방식입니다. 1968년 세워진 전일빌딩은 노후화되어 리모델링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5.18 당시 옛 전남도청 광장, 분수대에서 쫓겨온 시민들이 계엄군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 바로 이 건물이었고, 그당시부터 총탄 흔적이 꾸준히 발견되는 사실 등을 이유로 5.18 단체 등은 리모델링 계획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에 광주시가 전일빌딩의 노후화와 사적가치 등의 조사를 시행하고, 이 과정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건물 10층에서 헬기 사격 탄흔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이 때문에 리모델링하려던 계획을 바꿔 체계적인 건물 보존 방안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가능하다면 국가사적지로 정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원폭돔이나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처럼 역사의 흔적이 담긴 상징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삼엄한 군사 독재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저항한 민주 시민들이 있었음을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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