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자 전두환을 드디어 광주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의 측근들 핑계대로 치매기라도 있다면 정신을 놓은 틈에 혹시 사과하는 얘기가 나오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역시나 전두환은 철면피였습니다.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이 "5.18 발포 명령을 부인합니까?"라고 묻자 "이거 왜 이래!"라며 역정을 내는 모습에서 그는 5.18 이후로 조금의 반성도 해본 적 없는 학살자였음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출처 - JTBC


3월 11일 오전 8시 30분,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전두환의 자택 앞에는 취재진과 극우 단체 회원 들이 운집해 어수선했습니다. 경찰 6개 중대 350여 명의 병력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으나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전두환의 광주행에는 그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며 망언을 일삼은 부인 이순자와 변호사가 동행했습니다. 서대문 경찰서 형사들과 평소 전두환을 경호하는 경찰 경호대도 같이 이동했다고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12시 30분경 광주지법에 도착한 전두환은 승용차에서 내려 스스로 걸었습니다. 경호원의 부축은 없었습니다. 정신이 또렷하고 건강 상태도 좋아 그가 여태까지 재판을 기피했던 모든 이유가 핑계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보여주었습니다. 검찰과 경찰은 전두환이 자진 출석하여 출석을 강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 법원과 협의해 구인장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이 자기 발로 광주를 찾은 것은 1987년 이후 32년 만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재판이 시작되자 전두환은 재판장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며 헤드셋을 이리저리 고쳐 쓰고 중간에는 지루한지 꾸벅꾸벅 졸았다고 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광주 법정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다니 학살자 전두환의 뻔뻔함에 기가 막힙니다. 이번 재판은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전두환이 펴내 출간정지를 받은 회고록에서 저열하게 비난하여 사자명예훼손으로 불구속기소 되어 열린 공판입니다. 법정에 선 전두환은 변호사를 통해 5.18 당시 헬기 사격과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모두를 부인했습니다. 재판은 1시간 15분 만인 오후 3시 45분에 끝났습니다.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피해 자택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2019년 3월 11일 광주는 1980년 5월로 되돌아간 듯했습니다. 법원 후문과 내부 곳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출정가〉 등이 울려 퍼졌고 당시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과 신군부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혹시 모를 전두환의 참회를 기대하고 법원 주변에 갔다가 전두환이 역정을 내고 밥 먹으러 갔다는 소리가 들리자 분노와 불만을 토로하는 시민도 많았습니다. "전두환을 구속하라!", "5.18 망언 국회의원과 극우 인사 구속하라!"는 구호가 연이어 나왔으며 5.18 당시 가족과 친지를 잃은 희생자 유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한편 법원 후문 앞 광주동산초등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초등학생 20여 명이 창문 쪽에 서서 "5.18 진실을 밝혀라!", "학살자 전두환을 처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며 구호와 노래를 외쳐 부르기도 했습니다. 정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광주 법정에 선 전두환을 규탄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학살자 전두환의 전면 부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별다른 충돌 없이 전두환의 공판이 끝나기까지 광주 시민들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학살자 전두환을 고소한 조비오 신부의 조카인 조영대 신부는 법원에 출석한 전두환에게 "정말 잘못했다고 한마디라도 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출처 - 뉴스1


자국 군인들에게 학살을 명령했던 전두환에게 상처 입은 광주 시민들이 바라는 건 과오를 인정하고 잘못했다는 진심 어린 참회의 한마디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화해의 손길을 학살자 전두환은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5.18에 대한 전체의 죄를 묻는 재판이 아니어서 아쉬운 감도 있지만 전두환을 광주 법정에 세우기까지 32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대부분 그러했듯 가해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피해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1997년 전두환은 선고 받은 추징금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50% 남짓 납부하는 데 그쳤습니다. 전두환은 광주의 영령들과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들에게 사과할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학살자 전두환이 광주 법원으로 향하는 날 각 당에서 논평을 냈습니다. 당마다 전두환에 대한 호칭이 달랐습니다. '전두환 씨', '피고인 전두환', '전두환 전 대통령', '살인마 전두환', 이렇게 서로 다른 호칭은 각 당의 입장이 서로 다름을 상징합니다. 학살자와 5.18 광주에 대한 입장의 차이 속에 '5·18 진상조사위'는 반년째 표류하고 있습니다.

 

출처 - SBS

 

하지만 이번 광주 법정에 전두환을 세운 것은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5.18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주의 진실이 드러날수록 망언을 했던 자들의 입지는 좁아질 테지요. 지난날 과오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에게 법의 단죄가 내려지길 기대합니다.

올해로 36주기가 되는 5.18 민주화항쟁도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으로 시작했습니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이런 일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죠. 박근혜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실상 제창하지 못하게 지침을 내렸으며 박승춘 보훈처장은 이 교시를 받들어 올해도 제창을 불허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청와대 회동에서 협치를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또 하나의 쇼였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야당은 청와대 회동 무효를 선언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심지어 새누리당 원내대표조차 청와대와 보훈처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야당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내기로 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


1997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제창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제외되기 시작했습니다. 집권당과 정권의 성격을 보면 그 의도가 너무나 명백하죠. 보훈처의 해석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적으로 제창과 합창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개념이지만, 보훈처의 유권해석으로는 제창은 참석자 전원이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지만 합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죠.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5.18 민주화항쟁 기념식 동영상을 보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입을 다물고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외워서 부르고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주먹을 움켜쥔 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반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들고 있는 종이만 들여다볼 뿐 입을 열지 않습니다.


출처 - 유튜브


보훈처의 유권 해석대로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국가 기념식의 관행을 어긴 것이며 '의무적'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를 고의로 부르지 않은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보훈처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례와 무식함을 계속 알리고 싶어 이런 방침을 자꾸 고수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를 막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고 있는 걸까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그 이유가 그대로 드러나긴 합니다.


출처 - 페이스북


〈임을 위한 행진곡〉은 보수단체의 주장과 달리 종북이나 김일성 찬양을 위한 노래가 아닙니다. 탈북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는 주성하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에서 허락없이 부르면 잡혀가 정치범이 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북한과 연결시키는 찌질한 짓거리" 좀 그만하라면서 말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한 노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보면 그 수준의 저열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한편 5.18 민주화항쟁 당시 학살의 책임자였던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4대 조건이 선결되어야 된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신변 보호와 박탈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를 갖추는 등의 조건이 선결되어야 5.18 묘역을 참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광주에서는 죄인에게 무슨 예우냐는 반응이 나오고, 5.18 관련 단체는 책임 인정과 광주에 대한 사죄 그리고 대국민사과가 선결 조건이라고 대응하기도 했죠. 

 

출처 - KBS


하지만 살인마 전두환은 지난달 27일 《신동아》 기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항쟁 당시 시민군을 향해 총을 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동석한 전두환의 지인들도 인터뷰에 참여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나왔습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광주 침투와 관련된 정보 보고를 받은 적 없다는 전 전 대통령 말에)


고명승 전 삼군사령관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연희동에서 코멘트 한 일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전 의원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전 대통령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일베에서 5.18 관련으로 "종북, 빨갱이" 타령할 때 흔하게 나오는 주장이 북한 특수군 얘기죠. 그런데 그 주범인 전두환이 이런 논거를 부정한 셈입니다. 광주와 북한이 관련 있다는 일베의 주장이 헛소리임을 전두환이 밝힌 셈입니다. 한편 역사적 책임감으로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두환은 "광주에 내려가 뭘하라고요"라고 되물어 책임 인정과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출처 - 스포츠동아


한국인 작가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얘기했죠.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출처 - 《소년이 온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과 같이 고립되고 힘으로 짓밟히고 훼손된 사건 이면에는 광주를 수없이 되태어나게 한 국가의 원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해마다 후벼지는 그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철철 나고 있습니다. 5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2015년에 맞은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은 박근혜 정부에 의한 분열 그 자체였습니다.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여전히 거부했고, 마땅히 참석해야 할 박근혜 대통령은 기념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참석한 여야 대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가운데 정부 대표로 온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침묵했습니다. 한편 광주를 찾은 여당 대표 김무성은 물벼락을 맞았으며 야당 대표 문재인은 야유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군부 독재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민주 시민의 정의로운 항쟁이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와 여야 정치권의 무능과 혼탁으로 자꾸 그 정신이 퇴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비행은 5.18 민중항쟁의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여러 차례 5.18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출처 – EBSi


다시 기억해야 할 5.18 광주민주화운동, 신군부의 독재와 언론·방송의 굴종사

http://ideas0419.com/145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며 표현의 자유를 다시 돌아보다

http://ideas0419.com/354

 

군사 독재 정권의 후계자와 그 조력자들로 이루어진 현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나 여당의 기회주의와 야당의 무능은 질리도록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일베를 중심으로 급격히 증가한 5.18 희화화와 모욕은 다른 의미에서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습니다. 일베가 게시글이나 이미지 합성으로 5.18의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고 희생자와 유족을 모욕하는 일은 이미 악명 높습니다. 하지만 일베의 주장은 명백히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외신만 살펴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튜브


그런데도 한 일베 회원은 5.18 희생자의 관을 '홍어 택배'에 빗대어 표현하는 반인륜적 명예훼손을 저질러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생각비행은 우리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일베를 어떻게 봐야 할지 분석한 적도 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 일베, 어떻게 봐야 하나? : http://ideas0419.com/439

 

우리 사회에서 일베의 활동은 도가 지나쳐 점입가경입니다. 바로 어제 2015년 5월 18일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일베가 제35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장에도 침투해 있었습니다. 일베의 한 회원은 자원활동가 복장을 하고 자원활동가 표찰을 든 채 이른바 일베 손동작을 인증했습니다.

 


출처 - 아시아경제



이는 독일로 치자면 종전기념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 치러지는 유대인 학살 추모 행사장에서 자원봉사 복장을 한 채 '88' 혹은 '18'을 인증한 셈입니다. 욕이냐고요? 아닙니다. 88과 18은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극우인 네오 나치의 은어입니다. 생각비행이 최근에 출간한 책, 《알고나 까자 ―독일 사회를 통해 본 대한민국》을 통해 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암호는 '88'이다. '하일 히틀러Heil Hitler'의 앞 글자인 HH에서 H가 알파벳 순서상 여덟 번째이기 때문에 88은 곧 '하일 히틀러'가 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18'도 있는데, 앞의 이유와 마찬가지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A와 H를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유명한 암호로 '14단어(14Words)'가 있다. 이는 “We must secure the existence of our people and a future for white children(우리는 백인 민족의 존립과 백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이라는 문장의 단어 수를 의미한다. 또 RAHOWA라고 RAcial HOly WAr(인종적 성전)의 앞 글자를 딴 단어도 있다.

 



《알고나 까자 ―독일 사회를 통해 본 대한민국》 (김동석 | 생각비행) 21쪽  05 네오나치의 암호

 

전후 청산과 사죄의 모범이 되는 나라이자 이제 유럽의 리더로 우뚝 선 독일. 하지만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네오나치. 독일과 네오나치의 사정을 통해 우리나라와 일베 등 극우의 관계를 엿보는 일은 교훈이 되지 않을까요?


《알고나 까자》의 저자는 네오나치가 눈에 띄게 폭력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시기를, 독일이 통일되고 경제적 불균형이 심화되기 시작한 때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역 기반은 구동독 지역인데, 독일 통일 이후 폭력이 심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들의 움직임이 통일 이후 불어닥친 경제적 불균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동독인은 그들의 문제를 내부에서 찾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소수의 네오나치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2차 대전 때 방식처럼 '남의 탓', 즉 외국인과 사회적 소수자 혹은 좌파 정치가들에게 화를 풀어버리는 얄팍한 방식을 택했다.

이들이 분노를 해소하는 방식은 군중 심리에 의거해 작동하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네오나치들은 서로 모여서 자신들의 사상에 대한 복종심을 강화한다. 이때 범죄자는 자신이 매우 칭송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고 확신하는데, 그 확신은 동료들의 지지를 받을수록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이들의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시는 쉬우나 심리적으로는 그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설득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이 부분이 정말 어렵고도 가장 중요한 문제다.

여기에 어설픈 사상가 한둘이 가세해 자기합리화에 걸맞은 학문적 용어들을 보태주면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당위성에 더해 자부심까지 갖게 되며, 사상이 종교로 변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순교로 받아들이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알고나 까자 ―독일 사회를 통해 본 대한민국》 (김동석 | 생각비행) 16쪽  03. 네오나치의 규모


IMF와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 붕괴와 양극화, 남의 탓을 하기 위해 찾아낸 상대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혐오, 민주화 좌파 세력에 대한 증오와 테러, 군중 심리와 또래 집단끼리의 관계에 집착하는 10대를 중심으로 한 일베가 인기를 끄는 이유를 네오나치의 성립에 기대어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극우 언론과 극우 논객들의 부추김까지, 극우파의 대두는 서로 통하는 면이 있나 봅니다.

 

출처 - 한겨레


그렇다면 독일은 이 네오나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요? 우선 독일은 정부 차원에서 강력한 규제를 합니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은 민족주의 혹은 극우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나치 깃발인 하켄 크로이츠가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독일 국기가 집밖에 걸려 있어도 경찰이 찾아올 정도였다고 하죠. 인종차별을 처벌할 법적 근거도 있기 때문에 조치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점점 더 교묘해지는 극우세력을 억누를 수 있을까요? 정말 제목 그대로 알고나 깝시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2012년 튀링엔 지방에서 네오나치가 일으킨 테러에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식에 참석하여 "우리나라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부끄러운 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부끄럽다면 이를 고치려는 노력을 하면 된다. 물론 그 노력은 힘들다. 그리고 단기간에 되는 것도 아니다.



독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구 중의 하나가 "Kein Ort Fur Neonazis(네오나치를 위한 자리는 없다)"이다. 버스에도 지하철에도 길가에도 흔하게 붙어 있다. 지역 커뮤니티 형식으로 작은 조직들이 네오나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모여서 시위를 하거나 홍보를 하기도 한다.

그 외에 네오나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엑시트 도이칠란트Exit Deutschland라는 단체도 있다. 극우 그룹에서 나오려다가 신체적 위협이나 협박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주로 그런 일을 해결해준다.


《알고나 까자 ―독일 사회를 통해 본 대한민국》 28쪽  08. 극우와 작별하는 법


극우가 잘못된 것이며 이 사회에 발붙일 수 없음을 시민사회 차원에서 공고히 하고 극우 세력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사람들에겐 협력을 아끼지 않는 성숙한 의식이 독일의 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엑시트 도이칠란트의 '오퍼레이션 트로얀 티셔츠 운동'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2011년 8월 네오나치들이 주최한 음악 축제 현장에서 엑시트 도이칠란트는 해골이 그려진 티셔츠를 네오나치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해골 프린트에는 과격한 네오나치 찬양 문구와 나치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극우파들은 신나서 그 티셔츠를 입고 음악 축제를 즐겼다. 그리고 네오나치들은 각자 자기 집에 돌아와 그 땀에 절은 티셔츠를 빨았다. 그랬더니 티셔츠 위에 새겨져 있던 해골 프린트와 네오나치 찬양 문구들은 깨끗이 씻겨 내려가고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문구가 드러났다.


“네 티셔츠가 한 것을 너도 할 수 있어. 우리가 도와줄게 – 엑시트 도이칠란트”


《알고나 까자 ―독일 사회를 통해 본 대한민국》29~30쪽

 

결국 네오나치나 일베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사회적 약자이기에 오히려 다른 약자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잠시나마 강자가 된 기분을 느껴보는 가련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극우 성향의 단체나 커뮤니티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독일, 미국, 세계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들이 절대 사회적 강자가 아니면서 강자의 방식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사회적 강자들이 동조해주면 정말로 히틀러가 다시 세상에 나오는 것이지만 다행히 현대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이들의 행동은 자신들이 현재 소수자로서 혹은 사회적 약자로서 핍박받는다는 사실을 이상한 방식으로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도 인정받고 잘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고,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기에 그것이 불만인 것이다. 과도한 경쟁을 불러오는 자본주의에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알고나 까자 ― 독일 사회를 통해 본 대한민국》 30쪽  08. 극우와 작별하는 법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독일 사회와 달리, 사회적 강자들이 은근히 일베와 같은 무리를 부추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더 위태로운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한층 더 씁쓸하고 맥빠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었습니다. E. H.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파악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잊지 말자고 한목소리로 외쳤던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빨리 잊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과거 2차 대전 당시 많은 이들을 학살한 나치의 수뇌부를 단죄하기 위해 아직도 찾고 있는 독일과, 과거의 치부를 미화하려는 몇몇 잘못된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한국, 딱 그만큼이 두 사회의 차이점일지 모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