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 : [주식 이야기] 원래부터 주식은 천재지변 같은 극단적 위험 때문에 생겼다

일본 대지진과 주가의 상관관계를 말씀드리면서 주식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간단한 역사를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천재지변 같은 극단적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고수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투자의 일환으로 주식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죠. 그렇다면 그런 위험천만한 투자를 바탕으로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는 무엇일까요?

향신료, 애증의 기호품
이전 기사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1600년대 당시 유럽은 기술의 발달로 이른바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바다로 나가 무역을 했습니다. 거대한 함선과 무역선을 이용하여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동아시아와 교역해 막대한 부를 얻기 위함이었죠.

다양한 향신료. 15세기에 이 정도의 향신료를 가졌다면 섬 하나를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출처: 엔사이버 백과사전)

그때 사람들은 후추로 대표되는 향신료를 얻으려고 목숨을 내놓는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인들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부터 후추를 사용했습니다만, 중세 이후 중동의 이슬람교도가 로마의 무역로를 가로막자 아랍 상인을 통해 얻는 방법 외에 별다른 수단이 없었습니다. 후추 이외에도 정향(丁香), 육두구(肉荳蔲)와 같은 향신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후추는 인도에서, 정향과 육두구는 몰루카 제도(인도네시아)까지 가서 가져와야 했으니 향신료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게다가 이슬람권 국가의 지도자들은 향신료에 과대한 관세를 부가하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하는군요.

이러한 상황에서 항해기술의 발달, 잇다른 아프리카, 인도 항로의 개척-포루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의 희망봉(남아프리카 공화국) 발견,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 발견-은 많은 유럽인을 흥분시켰습니다. 이후 유럽 각 국가들은 앞다투어 함대를 만들고 신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유럽에서 선봉에 선 나라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는데요, 두 국가의 식민지 쟁탈전이 얼마나 심했는지 교황이 양국 간에 토르데시야스 조약(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가 차지하도록 인정한 조약)을 맺게 하여 중재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만큼 향신료는 당시에 큰 돈을 거머쥘 수 있는 황금알 낳는 거위와 같았죠.

동아시아에 등장한 서양인,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 후, 1511년 포르투갈은 말라카(말레반도 끝에 있는 항구 도시)공략하여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진출합니다. 1513년에는 중국과 자바섬에도 포르투갈 선대를 파견했는데요, 테르나테 섬(몰루카 제도의 섬 가운데 하나. 인도네시아 최북단에 있는 섬)에 도착한 이들은 포르투갈 군의 성채를 축조하고 그곳에서 향신료를 가져왔습니다. 몰루카 제도는 정향과 육두구의 산지였기에 이곳을 향료 제도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이곳에 에스파냐의 마젤란 선단이 도착하면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대립이 심해졌습니다. 1600년대에 들어 포르투갈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네덜란드인들은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동인도 회사 본부(출처: 위키피디아)


그 이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향신료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얻었으나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의 분쟁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되는 상황을 틈타 네덜란드인들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합니다. 이때 세운 회사들이 바로 동인도회사입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료 무역이라는 큰 유혹으로 말미암아 10여 개의 회사가 난립했습니다. 이는 기업 간의 불이익을 초래하여 동아시아에서 경쟁하던 에스파냐에 점차 밀리는 형국을 빚었습니다. 이에 1602년 정부에서 나서 10개의 기업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통합하기에 이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자카르타, 인도네시아 수도)에 총독정청을 두어 본격적인 동아시아 향료무역을 독점합니다. 진입 당시에 있었던 포르투갈, 영국 세력을 모두 축출하여 17세기에는 동양 무역을 관할하는 최고의 지위를 확립하고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합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과 무역을 한 유일한 국가였습니다. 동아시아에 진출했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로마 카톨릭 교회 선교 활동으로 말미암아 도쿠카와 막부와 충돌이 잦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를 믿었던 네덜란드는 선교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이에 도쿠카와 막부는 나카사키(長崎) 앞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 섬을 만들어 제한적으로 무역을 개방합니다. 이로써 일본은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의 서양 학문을 접하였고, 네덜란드는 당시 국제 결제 수단이었던 은화의 수입원을 마련했습니다. 벨테프레(박연)과 하멜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주식의 관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주식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지배권이 약해지자 네덜란드는 동아시아 진출을 도모했습니다. 네덜란드 왕실과 상인연합은 향료 무역에 나설 회사를 만들고 대선단을 꾸리기 시작하죠. 하지만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선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네덜란드에서 배로 몰루카 제도까지 가는 건 엄청난 비용을 요구합니다. 대규모의 무역선을 건조해야만 했고, 선원들을 모집하고 선원들을 먹일 식량, 그리고 그 지역에 정착하기 위한 재반 물품들을 구입해야 했으니까요.

162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채권.(출처 : 위키피디아)

이때 네덜란드 왕실과 상인들이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시민에게 돈을 투자받아서 대선단을 조직하고, 향료 무역에서 얻은 수익을 나누어준다는 생각이었죠. 당시 향신료의 가격은 어마어마했기에 선단이 네덜란드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투자금을 갚고도 남을 정도였죠. 이들은 네덜란드 국가 재정과 상인들에게도 엄청난 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투자한 돈에 대한 이익을 분배할 때, 누가 얼마나 투자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투자자가 한두 명이 아닌 수백, 수천 명이나 되니 정확한 이익 분배는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투자받은 돈을 모두 한 곳에 모으고, 그것을 자본금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보여주는 종이를 발급합니다. 자본금에 대비해 얼마만큼 투자했는지 증명하는 종이, 즉 주권·주식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이 궁하여 자신이 투자한 돈 가운데 일부를 돌려받고 싶어할 수 있습니다. 또 동인도회사가 크게 발전할 것으로 생각하여 더 많은 주식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도 생기겠죠. 이런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만나, 한 사람은 주식을 팔고 한 사람은 주식을 사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거래를 원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면, 더구나 서로 사는 지역이 다르다면 얼마나 불편할까요? 이런 번거로움을 해결하고자 특정한 장소를 정해 주식을 서로 거래하도록 정했습니다. 증권거래소의 시작이었던 것이죠. 암스테르담에 있는 증권거래소가 바로 그곳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주식'이란 개념으로 투자자를 모으고 성공을 거두자, 유럽의 여러 왕실은 앞 다투어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합니다. 여러 나라에 동인도회사가 생기게 되었죠. 이렇게 각 국가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유럽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주식이 생겨나게 된 짧은 역사를 돌아봤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는 분들 가운데 과연 그 시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그냥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주식투자를 한다면 수익을 거두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면 그 시장이 돌아가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생각비행에서 《이렇게 하면 나도 주식왕》을 출간했으니 앞으로 개미투자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전하겠습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투기(投機)라는 말의 의미는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사전을 보니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고 함'이라고 되어 있군요. 즉 올바른 투자나 발전을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시세 변동을 예상하여 이익을 보려는 발전 없는 행위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투기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한 몫 잡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큰 이익에는 그만큼 큰 위험이 따르는 법. 시세 차익을 노려 투기하는 경우, 투자한 대상에 거품이 끼기 마련입니다. 그 본래 가치 이상의 가치가 매겨지기 때문이죠. 이런 거품은 또 다른 거품을 낳아 결국에는 사라지고 맙니다. 거품이 꺼지면 피해자가 속출하니 종국에는 경제를 어지럽힙니다.

생각비행은 주식투자도 자칫하면 투기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주식투자 관련 연재물을 기획했습니다.
근대 유럽에는 3대 거품 사건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 <영국의 남해 거품 사건>, 그리고 <프랑스의 미시시피 계획>입니다. 이 버블 사건들을 보시고 앞으로 주식을 비롯해 투자 활동을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부디 투기가 아니라 올바르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튤립이 어떤 꽃이기에 투기의 대상이 되었나

튤립(출처: 위키피디아)

튤립의 원산지는 텐산산맥(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서 키르기스스탄까지 뻗어있는 산맥)이라고 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사업을 벌이는 가운데 튤립을 발견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시키고 궁전을 세우면서 몇 종의 튤립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튤립은 16세기 들어 유럽 각지에 전해졌습니다.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튤립은 네덜란드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네덜란드라고 하면 풍차와 튤립을 연상할 정도죠. 네덜란드에서 튤립 농사를 시작한 계기는 식물학자인 샤를 르 레클루제(Charles de l'Écluse)가 레이던 대학교(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에 소포로 튤립을 보낸 뒤부터라고 하는군요. 나중에 레클루제는 레이던 대학에 초빙되어 튤립을 연구하고 재배하는 활동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튤립을 얻는 방법은 씨앗으로 육성하는 방법과 모근 복제로 자근을 육성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씨앗을 파종하여 꽃을 얻기 위해선 6~7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므로, 대개는 모근 복제로 자근을 육성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바로 꽃이 피어 튤립을 빨리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모근 복제로 생성한 자근은 2-3개 정도만 모근으로 성장하고, 발아하지 않는 종근도 많았습니다. 튤립은 단기간에 수를 늘리기 어려운 꽃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튤립에 대한 급격한 수요를 생산이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튤립을 향한 지나친 욕망

세상에서 가장 비싼 튤립,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출처: 위키피디아)

1610년대에 튤립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비교적 재산에 여유가 있는 식물 애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아름다운 튤립의 뿌리는 고가로 거래되었습니다. 원예 애호가 사이에서 독자적인 품종개량을 거쳐 새롭고 아름다운 튤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품종은 돌연변이을 일으킨 보라색과 흰색 줄무늬 꽃을 가진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 영원한 황제)'였다고 하는군요. 일반적인 단색 계통의 튤립은 싼값에 판매되었으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구근은 아주 비싼 값(당시 집 여섯 채에 해당하는 가격)에 팔렸습니다. 튤립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이 그 인기가 높아졌고, 가격은 엄청나게 상승했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이 그린 유명한 그림 가운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그림이 있는데요, 그림의 주인공 툴프 박사의 원래 이름은 클라스 피테르존이었다고 합니다. 튤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름을 툴프(Tulp, 네덜란드어로 튤립을 뜻하는 말)로 바꿨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식물 애호가들의 튤립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대단했음을 방증하는 일화입니다.

인기가 높아진 튤립 때문에 튤립을 상업적으로 재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튤립을 꽃이 아닌 투기의 대상으로 본 것이죠. 이러한 투기바람은 튤립을 처음 재배했던 레이던에서 암스테르담, 하를럼과 같은 다른 네덜란드 도시로 전해져 수요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확천금을 번 사람도 나왔는데요, 고급 품종의 구근 하나를 팔아 집을 산 사람마저 나올 정도였습니다.

당시 튤립 구근이 현물로 거래된 것은 겨울이라는 한정된 기간이었습니다만, 투기 열풍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언제든 튤립을 거래하고 싶어했습니다. 계절을 불문하고 말이죠. 이에 연중 거래와 그에 따른 선물거래(품질, 수량, 규격 등이 표준화되어 있는 상품 또는 금융자산을 미리 결정된 가격으로 미래의 일정 시점에 인도·인수하기로 약정한 거래) 제도가 도입되는 결과를 양산하기도 했습니다.

투기가 낳은 어처구니 없는 거래 방식
그렇다면 튤립 거래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튤립 거래는 특정한 거래소가 아니라 그냥 술집에서 열렸다고 합니다. 거래를 위해 현금이나 현물 구근은 필요 없었다고 합니다. 그냥 "언제 돈을 내겠다" "언제까지 배달해주겠다"는 증서만 오갔고, 아주 적은 중도금으로도 튤립을 선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도금이라는 게 현금이 아니라 가축이나 가구와 같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헨드릭 게리츠 포트가 튤립 열풍을 풍자하여 그린 그림.(꽃의 신인 플로라는 두 얼굴의 여성과 환전상, 술꾼과 함께 차를 타고 바람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뒤를 타락한 하를럼의 직조공들이 따르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가는 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렇게 부실한 거래가 이뤄지는 가운데, 거래증서는 많은 사람을 거치면서 누가 채권자이고 누가 채무자인지도 모르는 상황이 속출했습니다. 이처럼 부실한 거래 방식 탓에 자본이 없는 사람도 투기에 참여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또한 이전에는 그저 열심히 일만 하던 농민들마저 튤립 투기 열풍에 가담하면서 튤립의 수요는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추세로 말미암아 값이 싼 튤립 품종의 가격마저 오르는 진풍경을 빚었습니다.

튤립 거품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어느 한 농민이 친구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에 갔습니다. 그는 친구 집 앞마당에 있는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알뿌리를 양파로 생각해 한 알을 캐서 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화를 내면서 농민 친구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농민이 먹은 것은 양파가 아닌 튤립의 구근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가격이 무려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네요. 결국 농민 친구는 평생토록 그 돈을 갚아야 했답니다. (튤립 투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튤립 구근 하나의 가격은 2500플로린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2500플로린이면 다음과 같은 물품을 살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밀 2마차분(550ℓ), 호밀 4마차분(1100ℓ), 살진 소 4마리, 살찐 돼지 8마리, 살찐 양 12마리, 와인 큰 통 2개(약 200ℓ), 맥주 4배럴, 버터 2톤, 치즈 1천 리브르, 침대 하나, 양복 한 벌, 은제 컵 한 개 - 찰스 매케이가 쓴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서)

비정상적인 투기의 종말

1637년 발간된 네덜란드 튤립 마니아에 대한 소책자. 튤립 시장에 참가한 사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으로, 튤립을 로마 신화의 여신 플로라에 비유하여 "욕심많은 플로라에게 바치는 바보들"이라고 했다.(출처 :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인들의 비정상적인 사랑은 1637년 2월 3일을 기점으로 종말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튤립의 가격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투기 거품이 꺼지면서 튤립 가격은 폭락합니다. 이 때문에 어음은 부도가 나고 지급할 수 없는 채무를 진 사람이 3000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튤립을 실제로 구매하려는 사람보다 투기를 위한 부당 구매자가 많은 상태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튤립 가격 폭락으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빚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과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 간의 말다툼과 야만도주가 성행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채권자인 동시에 채무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의회가 중재에 나서서 "조사가 끝날 때까지 튤립 거래를 보류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계약서가 일괄적으로 무효가 되었기 때문이죠. 이때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가난에 허덕이며 평생 빚을 갚다가 죽거나 혹은 자살하는 사람과 벼락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었죠. 작은 꽃 한 송이가 빚은 진풍경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튤립 투기, 어떻게 보셨나요? 튤립 투기의 역사를 보면서 올바르지 않은 투자, 즉 투기 행위가 사람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주식을 비롯한 투자 행위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할 때라야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귀중한 사례가 아닐까요?
 



대안공안(Alternative Space)이라는 곳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최근 인터넷이나 공중파 뉴스에서 대안공간을 다루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대안공간은 과연 어떤 곳이며 어떻게 활용되고 있을까요?

신인 작가 등단의 산실, 대안공간

미술품은 대개 어떤 공간(화랑, 미술관 등)에서 전시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됩니다. 초보화가이든 엄청난 권위를 인정받는 화가이든 간에 미술품을 전시하려면 사람들과 소통할 공간이 필요한 법이죠. 그런데 신인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공간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회적 보증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 전시 공간을 선뜻 내어주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얻지 못해 열정을 꽃피워볼 기회조차 못 잡는 신인 작가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 그것이 바로 대안공간입니다.

대안공간을 처음으로 기획한 곳은 미국이었습니다. 1969~1970년에 뉴욕의 그린 스트리트 98번지와 112번지 그리고 애플 스트리트 98번지에서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시작했는데요, 미술가들이 직접 운영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기존 미술관과 상업적인 화랑에서 받아주지 않는 실험적 미술이나 비주류 미술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면서 대안공간은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공간이자 진보적인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대안공간


한국에서 대안공간은 1990년대 말을 시작으로 2000년대에 들어 그 수가 늘었습니다. 1999년 대안공안 루프를 시작으로 서울에만 해도 여러 곳의 대안공간이 생겨났습니다. 현재 대안공간은 부산, 창원에도 생기고 있습니다.

대안공간이 이끈 변화
대안공간은 창작자의 명성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상업성에 연연하지도 않지요. 이뿐 아닙니다. 신진 작가들에게 작품을 전시하는 임대료를 받지 않습니다. 실험성과 독립성이라는 예술적 태도만 일치한다면 대안공간은 기꺼이 그들에게 공간을 제공합니다. 제도권에 없는 그야말로 대안적인 문화공간을 지향하는 것이죠.

이환권, 권오상, 정연두, 데비한


신인들에게 기회를 준 대안공간 덕분에 그간 전시회 준비에 어려움을 겪던 이들이 희망을 품고 꿈을 향해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간 미술인들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작품 활동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요, 대안공간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게 되면서 프로작가 생활을 시작한 분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현재 미술 시장을 주름잡는 미술인 가운데 대안공간이 배출한 사람도 많다고 하는군요. 조각가 이환권·권오상, 사진작가 정연두·데비한 같은 이들이 대안공간 출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안공간이 유명 미술인들의 산실이 되자, 유망한 작가를 미리 잡으려고 대안공간을 찾는 미술 관계자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대안공간에서 사회적기업의 길을 묻다
대안공간을 보며 얼마 전 여러분께 소개한 토키와장(トキワ荘) 프로젝트를 생각했습니다. 《사회적기업 창업 교과서》의 저자 야마구치 시게루가 시작한 토키와장 프로젝트는 지방출신 만화가 지망생 혹은 신인 만화가에게 작업공간과 주거공간을 빌려주는 사업입니다. 만화가 지망생이나 신인 만화가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이죠. 하지만 대개 작업공간이나 주거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만화 창작에 쏟을 절대적 시간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시간 부족은 만화 실력이 늘지 않는 결과를 낳고 결국 만화작가로 등단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토키와장 프로젝트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고 좋은 만화가를 양성하기 위해 시작한 사회적기업 '뉴베리'의 사업입니다.

토키와장 프로젝트 블로그(http://tokiwasou.dreamblog.jp/)


토키와장 프로젝트는 단지 공간을 빌려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화가 지망생끼리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동아리를 만들게 하거나 일감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만화 편집자를 초빙해 강습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여러 단체의 스태프와 정기적인 면담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만화가로 데뷔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 토키와장의 목표인 셈이죠.

최근 한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안공간도 토키와장과 같은 사회적기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인 발굴의 산실이라는 점에서 토키와장이나 대안공간은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도와 일을 창출하는 소셜 비즈니스"의 성격을 띠고 있으니까요.

최근 사회적기업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많은 사회적기업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진행되는 사업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기업이 많이 생겨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기업들을 통해 혜택을 받은 이들이 새로운 사회적기업을 창업하는 선순환이 우리 사회에 정착되길 바랍니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전공부 주변 마을지도


사회적기업가 정신을 배울 수 있는 학교

사교육 시장이 수조 원대에 이르고 아이들이 살인적인 경쟁으로 내몰리는 세태에 대한 반작용인지는 모르지만, 최근 다양한 형태의 대안학교가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자리 잡은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는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참교육을 실현하는 학교로 5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랍니다. 대안학교라는 요즘 말이 무색하게 반세기 전에 대안교육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시작한 셈인데요. 옛말에 이르기를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습니다.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뜻이지요. 그만큼 풀무학교는 다른 대안학교들과는 조금 다르게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곳이었습니다.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홍동면 마을 공동체를 얼마 전에 생각비행이 몇 분의 독자분과 함께 방문하고 왔습니다. 그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볼까 합니다. 

 
최근 생각비행은《사회적기업 창업 교과서》를 출간하고 이 주제와 연관된 다양한 기사를 기획해서 여러분께 알려 드렸는데요, 저희가 기사를 작성하면서 주요하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사회적기업가 정신'으로 응축할 수 있습니다. 근래 사회적기업에 관한 논의가 무성합니다만, '사회적기업가 정신'에 입각한 사회적기업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첫 출발은 좋았으나 영업 이익을 내지 못해 문을 닫는 기업이 부지기수요, 초심을 잃고 영리기업으로 전환하는 사례도 많기 때문이지요. 앞으로도 생각비행은 좋은 사회적기업을 발굴해서 알리려고 합니다. 그 기획의 첫 기사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환경농업전공부'를 선정했습니다. 사회적기업을 표방하진 않더라도 사회적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풀무학교의 설립자는 이찬갑, 주옥로 선생님입니다. 이찬갑 선생님은 오산학교 출신으로 ‘교육, 기독교, 농촌’에 의한 민족 구원을 위한 교육을 평생 준비했으며, 주옥로 선생님은 감신대를 나온 뒤 홍동에서 독립 전도를 하면서 ‘진리, 학문, 자립으로 그리스도인, 농촌수호자, 세계의 시민’ 양성을 위한 중등교육기관 설립을 염원했습니다. 이 두 분은 홍동 성서집회에서 만나 뜻이 일치하여 풀무학교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소개를 드려도 풀무학교가 어떤 곳인지 아직 잘 모르시겠죠? 여기서 풀무학교의 교육 목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풀무학교의 교육 목표

풀무는 성서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인생관과 학문과 실제 능력에서 균형 잡힌 인격으로 하나님과 이웃, 지역과 세계, 자연과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사는 평민(교훈)을 기르고자 한다.

 1) 성서위에 학원
 학생이 재학 중 성경을 배우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바른 인격교육의 바탕으로 믿는다. 
  2) 기본층의 평민
 자기와 남의 가치를 자각, 존중하면서 주어진 자기 실현과 사회 기여에 힘쓰는 기본층의 ‘깨어난 평민’은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고, 이는 이 사회의 저력이자 향상의 희망이다.
  3) 머리, 가슴, 손의 조화
 입시편중 교육을 배격하고 머리(학문), 가슴(신앙), 손(노작)을 고루 발전시켜 인문․직업교육의 극단적 2원성을 극복하여 전인교육을 지향한다.
  4) 작은 학교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다양한 소질과 능력을 찾아내어 스스로 배울 수 있게 돕고, 그들이 창조적 힘을 발휘하며 생활 속에서 인격적 만남을 할 수 있도록 학교 규모를 작게 한다.
  5) 전원 생활관 생활
 전원 생활관 생활을 통하여 학교는 예배하고, 배우며, 생산하고 생활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6) 머리도 꼬리도 없다(무두무미)
 교직원과 학생은 예수를 교주로 하여 각기 자기 역할을 하면서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는 일원이며 동료로서 학교 일을 민주적으로 협의, 결정한다. 
  7) 밝은 학교 생활
 학교에서 정한 10가지 약속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검소하고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도록 학생문화 환경을 마련하며 개별지도, 묵학시간 활용과 교실 안팎에서의 공동학습, 자치활동을 장려하여 학교생활을 밝고 뜻있게 한다.
  8) 더불어 사는 지역과 학교
 지역의 교육적 환경을 선용하며 지역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실현에 협력한다.
  9) 국제이해
 평화로운 동북아시아 건설을 위해 중국어와 일본어를 선택하여 배우고 일본의 자매학교와 교류하며, 재학 중 일본이나 중국으로 교류 학습을 하여 동북아의 중간 역할을 감당할 성실한 시민을 기른다.
 10) 사학의 책임
 학업이나 생활지도에 열심이고 사회에도 책임이 있는 사학의 자율적인 정신을 살린 풀무는 작은 학교로서 사람을 기르는 교육과 학교의 바른 모습을 꾸준히 추구하려고 한다. 
 
애초에 풀무학교는 고등학교 과정 위주로 학사운영을 했습니다만, 시일이 지나면서 기본 과정만 마치고는 농촌 현장에서 일할 조건이 되지 못해 전공부 과정까지 연장할 필요를 느꼈다고 합니다. 풀무학교 전공부는 시장경제와 경쟁에 대체할 세계관인 -다양성, 상호의존, 개체 속 전체, 순환, 조화, 자발적이라는- 생태의 보편법칙 실현에 농업이 가장 핵심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소농이 지역의 다양성을 살려 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함께 나누며, 모든 이해 당사자의 참여로 농민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평화 사회 실현에 중심축이 된다는 믿음을 품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농업과 농촌을 일으킬 농민을 기르고자 오랜 준비 끝에 새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에 개교했습니다. 전공부 홈페이지(www.poolmoo.net)를 보면 이런 소갯글이 있습니다.

전공부는 대도시 집중, 노동 경시, 과도한 경쟁, 엘리트 양성의 교육이 아니라 농촌교육, 민중교육, 정신교육, 실력교육과 더불어 학생 개개인의 인격과 그들이 지닌 다양하고 고유한 개성을 존중하는 인격교육, 일과 배움과 생활을 통해 개인의 머리, 가슴, 손을 고루 실현시키는 전인교육, 학교 자체가 자립하는 농사 마을 교육,
지역 속에 뿌리를 내리는 공동체 교육을 교육의 본질로 추구하는 울타리 없는 풀뿌리 주민지역대학, 마을과 더불어 사는 대안대학이 되고자 합니다.


학교와 지역은 하나다

생각비행이 방문한 홍동면은 마을과 학교가 하나라도 된 듯 구분하기 어려운 공동체였습니다. 풀무학교에서 교육받은 학생 가운데 마을에 정착한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풀무학교는 "성서 위의 학교, 더불어 사는 평민,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 학교와 지역은 하나다, 인생의 창업"과 같은 열쇳말로 '풀무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더불어 사는 평민, 학교와 지역은 하나다'라는 지역성을 기반으로 혼자만이 아닌 공동체 모두를 위한 교육 그리고 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정신을 잃고 있는 오늘날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지역에 귀농한 사람도 많지만 어떻게 하면 지역 주민과 더불어 잘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학교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삼았으나 이를 강요하거나 다른 종교를 차별하지는 않았다고 하는군요. 풀무학교를 다닌 분 중에 신부님, 수녀님, 스님들도 계셨다고 하니까요.

학교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학교 주변을 좀 둘러볼까요?


갓골 목공소


학교 근처에 갓골 목공소가 있습니다. 곡괭이를 달아 만든 문이 멋지지 않습니까? 그 어떤 장식 자재보다도 훌륭합니다. 육중하고 든든하면서도 시골스러움이 묻어납니다. ^_^


목공소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공구도 많았습니다. 도시에 자리 잡은 여타 목공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분은 목공소의 주인이자 풀무학교에서 목공일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홍동마을로 귀농했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정착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스스로 출자한 자금과 풀무학교의 도움을 받아 이 목공소를 차렸다고 합니다. 이제 목공소는 이 마을 아이들에게 목공일을 가르치고 마을 안의 크고 작은 목공 관련 일도 도맡아 하는 명물이 되었습니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일을 찾아 자신의 일로 만든다는 말씀을 들으니 지역과 함께 크고 함께 산다는 의미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밝맑도서관 가는 길

도서관 입구


이제 막 문을 연 밝맑도서관도 다녀왔습니다. 풀무학교 주변에 있는 생협이나 가게, 느티나무 헌책방 같은 곳까지 풀무학교 학생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전공부 학생들이 생활하는 기숙사는 한 장 한 장 스스로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풀무학교 전공부 기숙사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환경농업전공부



졸업식이 아닌 창업식을 하는 학교


학생들은 스스로 또 함께 공부하며 일하는 즐거움을 찾습니다.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 우리는 일도 하고 공부도 하는 사람이 되자"라는 개교 정신 아래 학생들은 다양한 과목을 공부하고 학교 실습지에서 공부한 내용을 직접 몸을 놀려 터득합니다. 지역 봉사활동도 빼놓을 수 없지요.

풀무학교 전공부가 다른 학교와 다른 점은 학생이 주축이 되어 학교 생활과 행사를 꾸려나간다는 점입니다. 교사와 학부모는 어디까지나 도움을 줄 뿐 학생 위에 군림하지도 않고 반대로 다 해주지도 않는다고 하네요. 대학은 물론 직장에 들어간 자식 주위를 맴도는 헬리콥터 부모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젊은이들이 되지 않도록 이끄는 교육법이라고 하겠습니다. 학교 구성원 각자가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공동체 역시 건전하게 운영해 나갈 수 있으니까요.

전공부 교무실


갓골생태연구소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전공부는 농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어서 농업을 중심으로 실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교생이 농업에만 매달리지는 않습니다. 학생 스스로 잘하는 일을 찾아 자기실현을 할 수 있고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도록 배려합니다. 이에 따라 학생은 농사를 짓거나, 목공을 하거나, 제빵을 하거나, 도서관을 운영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등 스스로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갑니다. 
풀무학교는 교육과정을 마치면 '졸업식'이 아닌 '창업식'을 한다고 합니다. 일반 대학교에서 졸업 논문을 제출하는 것처럼 학생들이 각자 하고 싶은 사업 하나를 선정하여 지속 가능한 일로 일구어 보는 과정이 풀무학교의 마지막 커리큘럼이라니,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습니까?



생각비행이 방문한 풀무학교는 자기실현과 공동체를 동시에 배려하는 '사람 냄새'나는 사람을 키우는 곳이었습니다. 오늘은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소개했습니다만, 홍동마을은 갓골 생태농업연구소, 풀무학교 생활협동조합, 느티나무 헌책방, 그물코 출판사, 갓골 어린이집에 이르기까지 '사회적기업가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기업의 보고였습니다. 앞으로 이 마을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소개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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