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6월을 맞아 자연스럽게 6월 민주항쟁을 생각해봅니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인 6월 민주항쟁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1979년 10월 26일)으로 찾아온 '서울의 봄'이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짓밟히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수많은 시민이 떨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6월 민주항쟁의 경과는 저희가 일전에 소개한 <한국을 민주화 사회로 이끈 결정적 운동, 6월 항쟁>을 보시면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6월 민주항쟁 때 많은 대학생, 지식인, 시민이 신군부에 의해 고초를 당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1980년대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의 바람이었습니다. 그 바람 이면에는 민주주의를 외치다 죽어간 사람들의 피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물이 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도화선 삼아 일어난 6월 10일 국민대회에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민중의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최두석 시인

최두석의 <성에꽃>은 군사독재시대에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꽃은 개인의 힘으로 피울 수 없습니다. 나와 이웃, 우리가 모두 힘을 다할 때 비로소 피울 수 있는 꽃입니다. 그 꽃은 어렵게 피었다가 우리가 외면하면 이내 시들고 마는 아주 연약한 꽃입니다. 사람들은 그 꽃이 시들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절감합니다.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항쟁, 6.10 민주항쟁으로 움튼 꽃이 만개하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언론과 개인의 자유가 파괴되고, 공정하지 못한 노동환경으로 빈부의 차이는 나날이 극심해지는 반면 국민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기득권층의 욕심은 1970·80년대의 <겨울 공화국>으로 회귀하는 양상입니다.

제대로 피지 못하고 시들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꽃을 되살리려면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이 땅에 뿌려져야 할지 모릅니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선명해지는 '성에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에꽃>의 화자처럼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를 그리워하며 가슴 아픈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피눈물 나는 생활을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들을 그대로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6.10 민주항쟁의 정신을 다시금 되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두석

1956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 국어과와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에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대꽃》《임진강》《성에꽃》《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꽃에게 길을 묻는다》《투구꽃》 등이 있으면 평론집으로 《시와 리얼리즘》이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4월 초파일을 맞아 천상병 시인의 <歸天>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4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에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는 까닭은 인사동 조계사 앞에 천상병 시인의 아내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찻집 '귀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문학가와 문학 지망생이 즐겨 찾던, 작지만 유명한 문화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슬픔을 초월한 듯한 마음과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을 가진 천상병 시인은 저에겐 마치 득도한 고승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歸  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가 표현한 '아름다운 이 세상'을 실제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순탄하지 않았던 그분의 삶 때문이겠지요. 천상병 시인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고등학교 3학년 때 추천을 받고 대학 2학년 때 추천이 완료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른 활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살아생전에 《새》라는 유고시집을 남겼습니다. 

천상병 시인과 부인 문순옥 여사

천상병 시인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 사건에 휘말린 이유는 간첩 혐의를 받던 친구의 수첩에서 천상병 시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천상병 시인을 친구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시집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받은 전기고문으로 몸과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로 풀려나 거리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행려병자로 오해를 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가난했지만 막걸리 한 잔에 행복을 노래했던 시인은 돈의 맛에 길든 세상, 이기심이 가득한 욕망의 세상을 향해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으로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행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나의 가난은> 중에서)이라며 작은 일에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천상병

1930년 일본에서 출생했으며 1993년 4월 28일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죽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강물>로 《文藝》지에 추천받고 서울대 상과대학 2학년에 추천이 완료돼 등단했다.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평생의 후원자이자 독자였던 목순옥 여사와 결혼해 시를 썼으며 중광, 이외수와 함께 3대 기인으로 불렸다. 
시집으로는 《새》《주막에서》《천상병은 처상 시인이다》《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등이 있다.

* 천상병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5월 16일과 5월 18일은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군사독재정권을 생각하게 되는 날입니다. 5.16은 박정희에 의해 4.19의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뀐 날이며 5.18은 전두환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국민을 군홧발로 짓밟은 날입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재정권은 1970년대를 지나 1980년 5월 18일 정점을 찍었습니다. 엄혹했던 그 세월 동안 이름 없이 쓰러진 많은 분의 피로 우리 사회는 지금 이 정도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 상황도 그렇게 밝지만은 않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무리가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상식이 아닌 비상식으로 한국 사회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 맺힌 현실을 노래했던 많은 시 중에서 양성우의 <겨울 共和國>을 소개합니다. 이 시는 1970년대 유신체제와 작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양성우 시집: 겨울 共和國


겨울 共和國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갈아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걸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라쳐서 누군가의 발밑에 까무라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 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은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랑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같은 라디오도 신문도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 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 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 양성우, 《겨울 共和國》(1977년 화다출판사) 

1992년에 양성우의 《겨울 共和國》을 처음으로 읽은 뒤로 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20년이 지나 시집을 다시 펼쳐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악랄한 유신체제의 현실을 '겨울 공화국'이라고 표현했던 시인의 마음을 처음으로 접했던 20대 시절보다 40대가 된 지금, 시의 구절마다 단어마다 배어 있는 애끊는 심정이 훨씬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끝없이 지치지 않고 봄을 기다리는 시인처럼 우리도 봄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거짓이 진실이 되고 비상식이 상식이 된 현실 앞에서 단순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봄이 오지는 않겠지요. "여보게/우리들의 슬픈 겨울을/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한사코 온 몸을/버둥거려야/하지 않은가" 라는 시인의 권유처럼 현실에서 버둥거려야 우리가 원하는 봄이 옵니다.

<겨울 공화국>은 활자화되기 전 1975년 2월 12일 광주 YWCA 회관에서 열린 민청학련사건 관련 구속자 석방 환영회 겸 구국 금식기도회에서 시인이 처음으로 낭송했다고 합니다. 그 후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광주 일대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시인은 재직하던 중앙여고로부터 사직 압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광주 중앙여고는 금호그룹을 창업하고 사세를 확장하던 박인천이 이사장이었습니다. 당시 기업인들은 정부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시인을 파면하라는 정보기관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사퇴하지 않고 계속 버텼습니다. 그러자 1975년 3월 12일 박인천 이시장은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시인을 파면합니다. 시인이 학교 측에 제출한 재심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시인은 여느 때처럼 출근했지만 교무실에 있던 그의 책상은 치워졌고 기관원들이 진을 치고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당 해고로 신음하고, 열악한 노동환경 탓으로 병을 얻거나 죽어도 언론이 외면하는 오늘날의 현실과 시인이 감내해야 했던 <겨울 共和國>이 겹쳐 보입니다. 

"신문, 잡지, TV가 정직해져야 하고 비겁하고 더러운 것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시인의 외침은 2012년 5월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하는가"라는 시인의 고백이 귀에 맴도는 5월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시집에 실린 양성우 시인의 모습

양성우
1943년 전라북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시인지에 <발상법> 등 6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저항시를 주로 썼다.《겨울 공화국》은 1977년 장편 저항시 〈노예수첩〉을 일본 월간지에 게재해 투옥된 상태에서 출간 되었다. 서문에서 고은은 " 正義 의 엘리지를 원한과 분노로써 확인하는 사내 양성우는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나 그의 마음과 우리 마음은 이런 책 말고도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고 쓰며 시인 양성우를 그리워 했다.
시집으로는 《발상법》《신하여 신하여》《겨울 공화국》《북 치는 앉은뱅이》《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5월제》《그대의 하늘 길》《세상의 한가운데》《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첫 마음》 등이 있다.

올해도 5월 18일이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이날만 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문이죠. 5.18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벌써 31년이나 흘렀는데, 과연 사람들 가슴에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박정희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고, 많은 사람이 그를 그리워하기까지 합니다. 1980년에 벌어진 5월 광주의 비극은 이른바 박정희 키드였던 신군부에 의해 일어났고 6월 항쟁으로 물러나기까지 철권통치를 자행했습니다만, 정작 그 당시 시민의 피로 쟁취한 자유를 누리고 사는 우리는 폭압자들의 과오를 잊고 지내는 건 아닌지 돌아봤습니다. 생각비행은 5.18 광주 민주항쟁 31주년을 기념하여 그날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기억하려 합니다. 특히 방송과 언론이 어떤 모습으로 신군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2.12사태로 촉발된 신군부의 권력집권 야망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의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와 비서실장 차지철을 살해했기 때문이지요. 김재규를 비롯한 10.26 관련자를 보안사가 체포하며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그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10월 27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되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맡으며 사람들 앞에 나섰다.

이후 사람들은 TV에서 생소한 사람을 한 명 보게 됩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그는 10.26 사건의 수사를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사회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제3호 보고서를 보면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으면서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12.12로 4성 장군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이등병으로 강등된 채 강제로 전역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12.12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장태완, 특전사령관 소장 정병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하소곤 같은 이들 또한 체포되어 수모를 겪습니다. 이와 반대로 12.12사태를 주도했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말도 안 되는 진급에 진급을 거듭하여 군 요직을 두루 차지했습니다.

5·17 쿠데타, 본격적인 권력 탈환 작업

군 내에 최고 권력으로 빠르게 부상한 전두환과 신군부의 야망은 쉽게 멈추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에 의해 정치군인으로 성장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점차 사회 전면으로 나섭니다. 그런 이면의 모습과 달리 표면적으로 사회는 10.26 이후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민주인사들의 석방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꽃피겠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비유하여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습니다.

중앙정보부장서리였던 전두환이 유학성 신임 중앙정보부장에게 중앙정보부기를 넘겨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인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여 전두환을 왕(King)으로 세우겠다는 계획, 이른바 'K-공작계획'을 시행합니다. K-공작계획은 언론을 회유하고 때론 협박하여 군부의 정치 참여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여론을 조성하고자 기획된 공작이었습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의 일환, 또는 연속선에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신군부는 언론인 간담회를 개최해 언론사주, 간부 등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신군부 측에 협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간담회에서 신군부는 사령관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과 평가를 수집·보고하고, 간담회 내용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또한 보고합니다. 이렇듯 언론의 협조를 유하는 가운데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공석이었던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여 사실상 정보기관을 장악했습니다.

모든 정보를 손에 쥔 전두환과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권력 탈환 작업에 착수합니다. 1980년 5월 12일, 전두환과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면 명목으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모의합니다. 이는 신군부가 정치에 전면으로 나설 계기를 만들려는 계획으로,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권력을 차지한 방법과 비슷합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을 중심으로 시위대는 10만 명이 모이는 등 최고조에 달했다.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학생들은 자진 해산했다.


심상치 않은 신군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학생 운동권과 정치권은 전두환과 신군부를 경계하는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5월 초부터 대학생들은 '전두환 퇴진, 민주화 일정 제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정치권은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가 개헌안을 접수하고 5월 20일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계엄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 정치 현안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5월 13일부터 대학생들에 의한 본격적인 가두시위가 시작되어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 대학생 10만 명이 집결했습니다. 그러나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대학생들은 해산합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한 것이죠. 이날 신현확 총리는 정치 일정을 앞당겨 1980년 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1981년에 선거를 시행해 정권을 이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들은 전국총학생회 회장단은 당분간 집회를 중지하기로 했습니다.

포고문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계엄법 제8조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 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2.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신고를 하여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순수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하되 정치적 발언을 일체 불허한다.
나.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학 포함)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라.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한다.
마.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① 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② 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③ 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는 일체 불허한다.
바.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상적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한다.
사.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 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1980년 5월 17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학생들과 정치권의 움직임 때문에 전두환과 신군부는 권력 찬탈을 위해 더욱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학생들의 거센 시위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5월 20일 임시국회에서 논의되는 계엄 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 찬탈 계획에 차질을 빚을 사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결의를 받아내고, 이를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강요합니다. 17일 오후 9시, 무장한 군인들이 중앙청에 배치된 가운데 국무회의가 열리고 특별한 토의 없이 비상계엄 확대안이 통과되어,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됩니다. 신군부는 이와 동시에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와 같은 일단의 조치를 단행합니다. 또한 보안사는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하고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했습니다. 12.12 사태 이후 치밀하게 준비한 5.17 군사쿠데타는 10.26 사건 이후 잠시나마 시민의 마음을 녹였던 서울의 봄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평범한 군인이 왜 잔혹한 진압군이 되었나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따라 전국에 계엄군이 투입되었습니다. 계엄군의 투입 목표는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함이었죠. 이런 사실은 투입된 계엄군의 90퍼센트가 전국 대학교에 주둔했다는 상황이 증명합니다. 계엄군의 움직임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조금씩 달랐으나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 수백 명이 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령 확대와 휴교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에 계엄군이었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구타하며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이런 만행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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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가 시행한 충정훈련. 공수부대원들은 강도 높은 훈련 탓으로 잠재적 분노가 쌓였다. (출처: MBC 드라마 <제5공화국>)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전남대학교에서 시작된 공수부대의 대응은 이상하리만큼 끔찍했습니다. 그 때문에 군인에게 흥분제를 먹였다는 소문도 돌았고, 일부 증언을 보면 계엄군한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는 내용도 확인되었습니다. 계엄군으로 투입되기 전에 공수부대는 특별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충정훈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훈련은 수도권 소요사태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대학생들의 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훈련이었습니다. 공수부대는 광주에 투입되기 전 충정훈련을 받았는데요, 훈련 강도가 대단히 높았다고 합니다. 부대원들은 부대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계속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유를 박탈당한 공수부대원들의 마음엔 분노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신군부는 계엄군에게 광주를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종용했습니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의 증언을 따르면 시위 진압이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한 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습니다. 5월 18일 23시부로 전달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을 보면 계엄군은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공수부대원은 광주 시내 골목을 누비며 가택을 수색하여 학생들을 체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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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계엄군. 시위자 체포가 목적이었기에 진압은 실로 잔인하게 이뤄졌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첩(고정간첩)’들의 책동으로 몰았습니다.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라고 발표했는데요, 이렇게 광주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규정한 상층부의 지침과 현장에 유포된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원들로 하여금 광주 시민을 국가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적으로 규정하게 했고, 결국 공수부대원들이 과격하게 시위를 진압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입대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자, 요인 암살과 특수 임무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공수부대원들이 보호하고 지켜야 할 대상을 무참히 진압해야 했던 어두운 역사 속에서 광주 시민이 일차적 피해자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군인 신분으로 엄청난 폭력을 휘두른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 또한 역사의 피해자는 아니었을까요?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에서 잔인한 폭력의 경험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어떻게 파멸로 이르게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권력에 굴종한 언론과 방송

오늘날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사는 5.18을 ‘민주화운동’이나 ‘민중항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과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당시에도 그런 평가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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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과격파, 간첩, 선동이란 자극적인 이야기로 광주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언론과 방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부르며 폭도가 시민과 군경을 다치게 했다는 허위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특히 《조선일보》는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이유는 '고정간첩의 침투 선동'에 의한 것이라며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전했습니다. K-공작계획부터 이미 언론은 신군부의 검열을 받고 있었고, '시국수습방안'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하며 발표된 계엄포고령 10호로 말미암아 언론 검열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언론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었고 신군부의 나팔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길들거나 일부 자발적으로 복종한 언론과 방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신군부가 규정한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가 사회를 어지럽히는 난동으로 묘사했습니다. 왜곡 보도에 격분한 광주 시민은 광주 MBC를 불 지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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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를 신설한 전두환의 행보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모습과 흡사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되자 신군부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권력 찬탈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신군부는 국보위를 통해 '안보 체제의 강화' '경제난국의 타개' '정치발전 내용의 충실'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의 확립'을 이야기했고, 자신들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박정희가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한 다음 이를 이용하여 군부의 정치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과 같은 행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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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은 전두환에게 아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전두환의 생일이나 딸의 결혼식 취재에 열을 올릴 정도였다.

신군부에 의해 전두환이 5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자 언론과 방송은 전두환 추켜세우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마치 <용비어천가>를 방불케 하는 행태였습니다. 전두환의 성장 배경과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뉴스와 각종 영상물은 독재자들이 국민을 세뇌하기 위해 단행하는 '프로파간다'와 다름없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오르기라도 하면 카퍼레이드가 벌어졌고 시민은 거리에 동원되었습니다. 언론과 방송은 그런 모습을 생중계하며 전두환을 치켜세웠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해외 순방길에 동행한 언론과 방송은 전두환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방송했습니다. 전두환은 독재자의 전형이었습니다. 권력에 굴종한 방송은 심지어 전두환 가족의 대소사까지 직접 챙기며 영상물을 제작해 바치는 어이없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신군부의 어두운 역사는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난 6월 민주항쟁으로 막을 내립니다. 시대적 흐름을 역행했던 신군부는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결국 6.29선언을 통해 항복하고 맙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얻어낸 민주화는 우리에게 민주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질 때마다 과거 독재의 악령들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회에 뭔가 희망이라도 보였다는 듯이 말이죠. 국민의 요구를 뭉개버리고 생명과 자유를 앗아가고,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으며, 자신들의 배만 불린 독재 잔당을 어떻게 희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광주민주화운동 31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떤 분이 재미있는 기사를 쓰셨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을 할 수는 없겠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그랬다면 '재스민 혁명'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성공하지 않았을까요?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기사보기: 31년 전 5.18에도 SNS가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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