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의 한일정상회담은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 열린 정상회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이후 2년 9개월 동안 한일정상회담을 거부해왔는데요, 일본의 역사적인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상회담을 거부하겠다는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위안부' 문제의 연내 해결을 못 박으려는 듯 강경한 모습을 내비쳤죠. 

 

사람들은 독재자이자 친일파였던 아버지 박정희의 뒤를 이은 대통령으로서 조심함과 동시에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이려는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강경한 요구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에 주목하는 분도 많으셨을 텐데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의 중심에 섰던 박근혜 정부와 대통령은 역시나 이번 정상회담 이후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출처 - 아이뉴스24

 

 

위안부 할머니 생활비 지원 중단 통보한 박근혜 정부

 

표리부동한 박근혜 정부의 파렴치함은 한일정상회담 직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듯 위세를 떨던 박근혜 정부가 뒤로는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활비를 끊으려고 획책했기 때문이지요.

 

《경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보건복지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지방자치단체들이 매월 지급해오고 있는 생활지원금이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복지사업과 중복된다며 지자체에 지원 중단을 통보했다고 합니다.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법에 따라 1인당 월 104만 원을 지급하고 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지자체는 재정 여건에 따라 20~85만 원을 추가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할머니들이 고령인 데다 일본군 '위안부' 후유증으로 정부 지원금 대부분을 병원비와 약값으로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사실상 지원금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정부가 따로 의료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어서 지금껏 지자체가 추가로 지원을 조금씩이나마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지극히 공무원적인 탁상행정으로, 지원금이 중복되니 중단하라고 통보했습니다. 이게 과연 '위안부' 문제를 연내 해결하겠다던 정부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는 언어도단을 일삼으며 국정화 교과서를 옹호하는 보수단체에는 매년 200억 원이 넘는 세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할머니 한 분께 들어가는 100만 원 남짓한 돈이 아깝다고 끊어버리겠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눔의 집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희남 할머니는 "(정부가) 어차피 우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거 빨리 죽기를 바라는가 보구먼. 할 말이 없다"며 비통한 심정을 전했습니다. 시민사회가 분기탱천한 것은 물론입니다.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화들짝 놀란 새누리당은 서둘러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한일정상회담을 치르고 총선도 다가오는 마당에 혹여 흙탕물이 튈까 걱정한 거겠죠. 박근혜 정부는 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왔습니다. 일단 찔러서 간을 본 이후 역풍이 세면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반발이 덜할 것 같으면 찍어누르는 식이죠.

 

 

박근혜 대통령, 애초에 '위안부' 문제 해결 의지가 있었는가?

 

이렇게 앞뒤가 다른 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보면 과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집니다. 그저 또 한 번의 패션쇼 외교에 그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일정상회담을 치르고 3일 만에 청와대는 '위안부' 문제에서 발을 빼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4일 '위안부' 문제를 연내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을 두고 5일 청와대는 일본은 합의 문안에 충실한 것이라며 양국 간 이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2년 9개월 동안 한일정상회담을 거부해온 명분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연내 해결을 천명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과 너무나 다른 청와대의 발표는 대통령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발언이 거짓이었고, 그간 정치적인 쇼를 했을 뿐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지난 11일 한일정상회담 이후 첫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장급 협의가 개최되었지만, 빈손으로 마무리된 것을 보면 한일 양국 간 정상회담은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출처 - 팩트TV

 

결국 일본 쪽에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에 의하면 아베 일본 총리가 지난 2일 한일정상회담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위안부' 배상 문제도 이미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법적 문제가 종결되었다고 발언했다죠. 다만 인도적 관점에서 민간 차원의 지원을 하겠다는 의사만 밝혔다고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한일 청구권 협정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맺은 굴욕적인 협정이었죠.

 

굴욕적인 한일협정으로 정당한 배상과 사과의 길을 혼탁하게 만든 당사자의 후손이 과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망치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친일인명사전》은 반대한민국적? 친일파 후손들의 적반하장

 

이런 상황이다 보니 친일파의 후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국정교과서 논란의 후폭풍으로 《친일인명사전》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는데요. 서울시 교육청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다음 달부터 학교 현장에 보급하기로 했으나 청와대, 교육부와 국정교과서를 추진해온 새누리당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부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친일파의 후손다운 대응 방식입니다. 

 

오히려그들은 감히 《친일인명사전》을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는 것을 '반대한민국적, 반교육적'이라며 비난하는 적반하장의 극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친일 전력이 있는 수구 대표 신문인 《조선일보》는 사설까지 동원하여 《친일인명사전》을 막기 위해 보수단체와 학부모들이 나서줄 것을 선동했습니다. 《조선일보》의 전 회장인 방응모는 《친일인명사전》뿐 아니라 고등법원 판결을 통해서도 빼도 박도 못 하는 친일파임을 판결받은 바 있습니다. 박정희, 방응모에 이어 《친일인명사전》 개정판에 이름을 새로 올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아버지 김용주에 이르기까지 친일파의 후손들로서는, 이 책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두루 읽힐 상황을 어떻게든 막고 싶을 겁니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여 반대 여론이 훨씬 높은 국정교과서 문제 국면에서 그들의 변명이 군색해질 테니까요.

 

출처 - 한국일보

 

하지만 내년에는 경기도 모든 중고교에 《친일인명사전》이 보급됩니다. 서울시교육청에 이어 두 번째인데요. 이미 비치된 곳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학교에 《친일인명사전》 비치를 위한 예산을 지원한다고 경기도교육청이 밝혔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학생들이 정확하고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여 비판적인 의식을 키울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친일파와 독재의 후손들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렇게 시끄러운 와중에 수능을 치른 수험생 여러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이 비치되어 있다면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비정상'을 '정상화'하며 나라를 망가뜨리고 있는 무리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왜 지금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게 되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지난 4일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함지뢰가 폭발해 두 명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목함지뢰는 나무상자에 TNT 화약과 신관을 넣은 지뢰의 한 형태입니다. 지난 2010년 민통선 내 임진강 부근에서 나무상자를 주운 한 모 씨가 무심코 뚜껑을 열다 폭발해 사망한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졌지요. 지난 4일 발생한 목함지뢰 폭발사고로 김 하사는 오른쪽 발목을 잃었고, 하 하사는 양쪽 무릎 아래로 두 다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20대 초반으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평생토록 안고 가야 할 상처를 입은 셈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번 사건과 관련한 국방부의 긴급 현안보고를 위해 12일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의 내용을 보면 지난 4일 북한 도발 가능성이 확인됐고 우리 군 하사 2명이 지뢰 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통일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다음 날인 5일 아무 생각도 없이 북한에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안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였던 유승민 의원조차 정신 나간 짓이라고 돌직구를 날리며 정부 부처 간 엇박자를 질타했습니다.

 

출처 - 한겨레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지뢰 사건이 터진 나흘 뒤인 8일에서야 열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늑장 대처는 세월호 사고 때나 메르스 사태 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의 백군기 의원은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사건 당일인 4일 밤에라도 열려야 했는데 4일이나 지나 열렸다니 이게 국가인가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메르스 때는 재난 관리의 컨트롤 타워는 청와대가 아니라며 발뺌하더니 이제는 국가안보의 컨트롤 타워조차 아니라고 발뺌하려나 봅니다. 이쯤 되면 대체 청와대의 존재 이유가 뭔지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출처 - 경향신문

 

황당한 일은 또 있습니다. 최전방의 지뢰폭발 사고는 군 관련 사건임에도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국방부 장관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보고받은 것으로 안다고 했지만,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보고를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간 많은 참사를 겪고도 박근혜 대통령의 소통 부재는 바뀐 게 없다는 사실만을 재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국정원 해킹 사건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지뢰 사건이 터진 다음 날인 지난 5일 경원선 남측구간 철도복원 기공식에 참석해 "북한은 우리의 진정성을 믿고 용기 있게 남북 화합의 길에 동참해주길 바란다"고 축사했습니다. 지뢰 사고에 대한 초동 대처가 재빨랐다면 대통령에게 관련 사실이 제때 보고되었을 것이고, 경원선 기공식에서 대통령이 이런 축사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정부 부처 간 불통 외 그 이면에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할 뿐입니다.

 

출처 - 뉴시스

 

아무튼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목함지뢰 사건의 희생자들만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입었지만, 군인 신분인 김 하사와 하 하사는 군 당국의 불법이나 과실이 드러나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공무원은 당국의 불법이나 과실이 드러날 경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지만, 군인과 경찰은 불가능합니다. 헌법 29조 2항과 국가배상법 2조 1항인 이중배상금지 규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인과 경찰의 기본권, 평등권을 침해하는 이 법률을 헌법에까지 박아넣은 사람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이중배상금지는 군인이나 경찰이 전사하거나 순직, 부상했을 때 정해진 재해보상금, 유족연금, 상이연금 등만 받을 수 있을 뿐, 국가의 불법이나 과실이 밝혀져도 이에 따른 손해배상은 청구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달러벌이 목적으로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생겼습니다. 베트남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우리나라 젊은이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전쟁 상황에선 상관의 부당한 명령이나 다른 군인의 직무상 불법행위, 과실 등으로 숨지거나 다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정상적이라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청구해 국가 배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이를 사전에 봉쇄하고자 국가배상법 2조를 공표한 것이죠.


1971년 대법원은 이 조항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군인과 경찰을 차별하는 조항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반기를 든 데 격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위헌 결정을 내린 대법관들의 연임을 막고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이중배상금지를 아예 헌법에 박아넣은 겁니다. 헌법 29조에 유신헌법의 잔재가 지금도 남아 있는 셈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도 베트남전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박정희와 박근혜 부녀를 위해 각종 맞불 시위에 동원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중배상금지 규정으로 군인과 경찰은 국가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거나 불법에 노출되어도 법에 호소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이번 목함지뢰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군이 지뢰를 매설했다는 국방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는다면 무장한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우리 군이 경계 임무에 실패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작전에 실패해온 우리 군의 무능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14년 6월 강원도 22사단 55연대 GOP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국방부가 운용한 관심병사 제도의 유명무실함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뿐 아니라 최전방의 살인적인 GOP 경계근무의 문제점이 드러난 사건이었죠. 임 병장의 총기 난사 및 무장탈영 사건에서도 군의 초동 대처는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군의 DMZ 감시체계의 허점이 노출된 사건은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2012년에 발생한 이른바 노크 귀순 사건이었죠. 북한군 병사가 철책을 넘어 우리 군의 생활관 문을 노크해서 귀순 의사를 밝힌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전방 경계의 허술함과 군 기강 해이의 문제점이 드러난 사건으로 국가 안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천안함 사건이 있습니다. 침몰한 천안함을 둘러싼 의혹은 지금도 법정 공방 중입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의 원인은 아직도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무능한 이명박 정부와 군은 북한을 원흉으로 몰아 면피하려 했을 뿐, 무고한 병사들의 죽음을 책임지는 지휘관은 없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지난 4일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의 원인을 규명해 군 지휘부의 실책이나 과실이 있었다면, 그리고 이에 대해 혹시 불법적인 입막음이 있었다면, 김 하사와 하 하사는 국가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여야 합니다. 이번 목함지뢰 사건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인 주호영 의원조차 군의 경계 실패라는 지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요즘은 정부와 국가기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만, 지뢰 사고와 관련된 국방부의 발표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전협정을 어긴 북한의 도를 넘은 행위에 대해서는 군사정전위를 통해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울러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억울하게 희생되는 병사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이중배상금지라는 독소 조항을 철폐하는 데 우리 사회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무장지대(DMZ)를 '드리밍 메이킹 존(Dreaming Making Zone)'으로 만들겠다는 한심한 소릴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Dreaming Making Zone이 아니라 Dakaki Masao Zone"이겠지 하며 비웃겠습니까?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이중배상금지가 들어간 유신헌법 제정에 투표한 사람이라 썩 믿음이 가진 않지만, 아버지의 잘못을 이제라도 바로잡기 바랍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젊은이를 돌보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애국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출처 - 경향신문

출처 - 노컷뉴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곧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독립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죠.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에서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했습니다. 

광복절의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뜻합니다. 1930년 3월 1일을 기념하여 소설가로 알려진 심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는데요,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오이다.

출처: 《한국대표시선》, 참한문화사, 1983년/ (원서:《그날이 오면》,漢城圖書株式會社, 1949년)

1901년에 태어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어 퇴학당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그날이 오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이라는 구절에서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그날’은 그가 죽은 지 9년 후에 도래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했기에 뼈아픈 역사의 길로 이어지고 맙니다. 해방 후 좌우의 사상대립, 동족끼리 총칼을 겨눠야 했던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성취하기까지 흘린 국민의 피... 이 모든 것이 따지고 보면 친일인사를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는 그대로 반복된다고 하지요.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채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맺은 ‘한일기본조약’은 지금까지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을 가로막는 지나치게 친일적이고 굴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문학계도 친일논란에서 비켜갈 수 없습니다. 일제 때 학도병 자원을 독려하는 내용의 시를 썼던 모윤숙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외교관으로, 박정희 정권에서는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친일 시인으로 알려진 서정주는 훗날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습니다. 이처럼 친일 인사는 사회 기득권과 연결되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를 이어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친일 문학인 31명의 작품은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글만 잘 쓰면 반민족 행위인 친일을 했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선례로 남아 대한민국의 역사의식을 흐리고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 중 친일문학인 31명>

김기진(金基鎭) 김동인(金東仁) 김동환(金東煥) 김문집(金文輯) 김억(金億) 김용제(金龍濟) 김종한(金鍾漢)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박영희(朴英熙) 백세철(白世哲) 서정주(徐廷柱) 유진오(兪鎭午) 윤두헌(尹斗憲) 이광수(李光洙) 이무영(李無影) 이석훈(李錫(水+熏))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장덕조(張德祚) 장은중(張恩重) 정비석(鄭飛石) 정인섭(鄭寅燮) 정인택(鄭人澤) 조용만(趙容萬) 조우식(趙宇植) 주영섭(朱永燮) 주요한(朱耀翰) 채만식(蔡萬植) 최재서(崔載瑞) 최정희(崔貞熙)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합니다. 작가 심훈은 그런 점에서 삶 가운데 온 힘을 다한 예술인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소설에서, 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친일의 도구로 사용했던 여느 예술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였습니다. 특히 그가 쓴 대표적인 장편소설인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사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어 그해 9월 10일~1936년 2월 15일까지 신문에 연재되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심훈의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젊은이들의 강한 저항의식과 휴머니즘이 그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계몽운동은 러시아의 브나로드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브나로드’는 말기 러시아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입니다. 1874년에 많은 러시아 학생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이 계몽운동을 브나로드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운동은 국내에서 농촌계몽운동으로 발전해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담은 작품 <상록수>는 리얼리즘 농촌문학을 여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제의 억압으로 신음하는 민중을 깨우치는 역할을 잘 담고 있습니다. 심훈은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가 살면서 <상록수>를 집필했는데요, 이런 농촌의 경험이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았던 심훈이 그토록 원하던 해방의 ‘그날’은 67년 전에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67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이 온전히 완성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친일,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그날은 오지 않을까요? 많은 국민의 바람인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완성되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심훈

본명은 심대섭이며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으로 활동했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당하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해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 영화, 소설 등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7년 결혼한 왕족 이해영(李海暎)과 1924년 이혼했다. 1925년 번안한 소설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했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하여 제작했으며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성공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으로 영화제작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는 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했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했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했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무산되고,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두 번에 걸쳐 연재가 중단된 소설 <동방의 애인><불사조>와 애국 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는 가난한 인텔리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다. 대표작인 <상록수>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해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휴머니즘이 기본적으로 흐른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많은 직장인이 근로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당하게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징계를 당하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많은 근로자가 자신에게 그런 부당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늘 사건은 예상치 못할 때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근로자의 권리를 이해하는 일은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대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비행 편집자 중 한 명도 예전에 외국계 출판사에 다니다 속한 부서가 6개월 후에 사라지는 바람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퇴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부당한 해고를 당했지만 나중에야 근로자의 권리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꽤 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때의 충격이 《입사부터 퇴사까지 직장인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근로자의 권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김남주 시인은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생각하며 <고난의 길>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고난의 길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이소선 여사가 그 어머니고
전태일 열사가 그 아들입니다

나는 혹사의 노역장으로 노동자를 내모는 자본의 세계에 살면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상복을 입고
불에 타 죽은 아들의 사진을 껴안고 오열하는 이 여인이 그 어머니인가
목놓아 흐느끼는 모습이
험한 세상에 자식을 빼앗기고
가파른 인생을 사는 우리네 어머니들과 꼭 닮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여
자식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여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식이 굴리다 굴리다 힘에 겨워 못다 굴린 삶의 무게를
그 무게를 머리에 이고 당신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그 길의 시작과 끝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길에는 끝이 있습니다 나도 가렵니다
자본의 무게에 짓눌린 노동자의 틈에 끼여 어깨동무하고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을 함께 가렵니다
노동자가 여는 해방의 길이 인류해방의 길과 맞닿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한테 배워서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근로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법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최소한의 근로 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여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근로조건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근로실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사용자들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하고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 후 1970년 9월 재단사로 평화시장에 다시 돌아온 전태일은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만듭니다. 그러고는 또다시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설문지를 만들어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이런 사실이 《경향신문》에 실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자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임금과 노동시간,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입니다만, 일이 확대되기를 싫어했던 박정희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또한 사용자들은 삼동친목회를 빨갱이 조직으로 몰아 근로자들로 하여금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임을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하고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사용자들과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끝나려 할 때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내달렸습니다. 그는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정도의 권리나마 누리고 있는 것은 전태일 열사와 그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희생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고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노동자의 현실은 더 열악해지고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알리려고 했던 노동자의 권리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상 앞에 놓인 이소선 여사의 영정사진

시인 김남주의 시적 주제는 현실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은유나 상징보다는 직설적으로 주제를 드러내는 예리한 육성으로 현실을 노래했습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1980년대에 문학의 보편적 주제는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통일논의와 노동자들의 권익향상 같은 문제였습니다. 시인 김남주는 철저하게 1980년대 상황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시인이기보다 전사로 불리기 원했고 자신이 쓴 시가 부조리한 현실에서 혁명의 도구로 쓰이길 원했습니다. 그는 <나는 나의 시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또한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 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일어서는 봉기의 창 끝이 되기를

김남주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를 사용했습니다. 시가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지만 어두운 현실조차 미화한다면 아름다움의 진정성은 빛을 잃고 맙니다.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시는 아무도 읽지 않는 언어의 낭비입니다.

이런 김남주 시인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시가 있습니다. <법 좋아하네>의 한 구절입니다. “이게 법이지요/목에 걸면 그것은/부자들에게는 목걸이가 되고/가난뱅이들에게는 밧줄이 되지요.” 시를 통해 시인은 현실에서 법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자의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는 현실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의 표현은 불행하게도 2012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온갖 비리를 저지르다 심판대에 선 대기업 총수나 정치가들에겐 면죄부를 주는 법,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땐 밧줄로 목을 조이는 법.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끝까지 행동하며 온몸으로 시를 쓴 이가 바로 시인 김남주입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김남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처럼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가졌다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아니라 힘 있다고 국민을 무시하는 세상이 아니라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나누는 세상, 힘이 없어도 도와가며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요즘 '경제민주화'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경제민주화입니까? 헌법 제119조 1항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런 법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런 법이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전태일과 이소선이 앞으로 또 자신의 삶을 불살라야 헌법이 규정한 소득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날로 팽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이소선과 전태일 모자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업의 목적이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땀 흘린 노동자가 생존을 위협받지 않고 행복한 경제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본을 지키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를 위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알고, 법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일터를 사랑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남주
1946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94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라남도 광주일고에 입학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3선개헌 반대와 교련반대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1973년 유신반대운동을 하다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2년형을 받고 8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1974년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습작생활을 하다 그해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1978년 서울로 올라와 남조선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97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88년 12월 가석방됐다. 그는 살아서 "시인이라기보다,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전사"라는 말을 즐겨 말했다. 시집으로 《진혼가》《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사상의 거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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