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지난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엄수되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빈소를 찾아 발인을 함께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는 불참했습니다. 그런데 29일부터는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순방을 나간다고 합니다. 감기로 골골 앓는 소리나 하던 박 대통령이 힘이 어떻게 다시 솟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23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은 5분 만에 조문을 마친 후 방명록조차 적지 않고 떠났습니다. 사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은 악연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를 타도한 민주 투사와 타도 대상이었던 독재자의 딸 사이니까요. 이 때문인지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과가 재조명되며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된 행동들이 도드라지고 있습니다.

출처 - 한겨레



김영삼의 검정 교과서를 다시 국정교과서로 후퇴시키고 있는 박근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공과가 크고 확연히 구분되는 대통령도 없을 겁니다. 대표적인 공이라면 정치적 라이벌이자 민주화의 동지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박정희 시절부터 군부 독재와 싸우면서 결국 군부에서 민간으로 선거를 통해 정권 이양을 쟁취해낸 장본인이라는 점이겠죠. 군부 독재의 대표적 세력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하기 위한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것 역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대 치적일 겁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치적은 역사 바로 세우기였습니다. 친일의 잔재인 중앙청을 폭파해 한때 90퍼센트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한 그답게 당시까지 '혁명'이라 불리던 박정희의 '5.16'을 군사정변, 쿠데타로 명확히 규정했으며, 광주 학살을 자행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신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워 사형을 구형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전 역사의 잘못을 정정하여 역사교과서에 기록한 사람도 고 김영삼 전 대통령입니다. 역사교과서에 박정희와 군부세력이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을 구실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었다고 적어넣게 한 사람이죠.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국정교과서 체제를 지금의 검인정 체제로 바꾼 사람이기도 합니다.

 

출처 - 노컷뉴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이뤄진 검인정 체제를 독재정권 시절의 국정교과서로 퇴행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복면을 쓰고 시위하면 안 된다는 '복면금지법'을 밀어붙이면서 정작 국정교과서 필진은 철저히 복면 속에 숨겨두고 있습니다.



유체이탈화법과는 다른 김영삼의 어록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년에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을 일삼기도 했지만, 민주투사 시절엔 수많은 명언을 쏟아낸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번역기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의 유체이탈화법의 극치를 보여주는 박근혜 대통령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직설적으로 돌직구를 던지는 고 김영삼 전 대통령한테서 '칠푼이' '독재자의 딸' 등의 소리를 들었으니 싫어할 법도 합니다. 2006년 지방선거 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에 얼굴을 베이는 테러를 당했을 때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입원한 박근혜를 찾아 건넨 말이 "나도 (당신 아버지 박정희에게) 초산 테러를 당한 적이 있는데..."였다고 하지요. 이런 일화에서 드러나듯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출처 - 허핑턴포스트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가장 유명한 말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때문에 나왔습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로 구속도 당하고 YH무역 사건으로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으며,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을 종식해줄 것을 직설적으로 언급한 탓에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상 초유의 국회의원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 1979년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한 말이 바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였습니다.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에 대해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돌직구 발언을 해 '버르장머리'를 대체 어떻게 통역해야 할지 통역자를 난감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정치 슬로건처럼 등장한 '대도무문(大道無門)'과 함께 사람들 뇌리에 각인된 명언 중 하나일 겁니다.



IMF보다 더 큰 잘못, 3당 야합


하지만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앞선 업적이 IMF 외환위기로 일순간에 날아갔습니다.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악재도 잇따랐죠. 아들 관리를 잘못해 비리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곤란함은 순전히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수십 년 군사독재의 적폐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IMF 외환위기보다 3당 야합이 더 큰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90년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킨 것을 말하는데요. 이는 민주화운동의 투사가 신군부와 유신 세력의 잔당들과 한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선택이었다고는 해도 그 폐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3당 야합에 반대하며 등장한 새로운 인물이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죠.


부마항쟁으로 한때 민주화의 성지라 칭송받던 지역이 3당 야합으로 인해 지역주의의 늪에 빠져 수구세력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보수 대연합'이 만든 지역주의 구도는 선거 때마다 민주주의 세력의 발목을 잡게 되었죠. 민자당은 신한국당, 한나라당 그리고 새누리당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출처 - 한겨레


따져보니 살아 있는 대통령은 이제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밖에 없군요. 전두환과 노태우는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와 권리를 박탈했으니까요. 민주화를 위해 희생했던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고단한 삶을 산 분들이니 편히 쉬셔야 하겠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남은 우리는 폭압적인 정부에 맞서 다시 민주화를 논해야 한다는 현실에 한숨이 나옵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 중 몇 가지를 기억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같이 고민했으면 합니다.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

-1973년 9월 24일, 국회 대정부질문,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규명 촉구하며


대도무문(大道無門),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

-1979년 6월 4일, 동아일보 인터뷰. 5·30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순교의 언덕, 절두산을 바라보는 이 국회의사당에서 나의 목을 자른 공화당 정권의 폭거는 저 절두산이 준 역사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1979년 10월 4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에서 제명되고


군정을 학실히(확실히) 종식시키겠습니다.

-1987년 대선 유세에서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

-1993년 신경제계획 민간위원과의 조찬에서 부동산실명제를 소개하면서

 

국민 여러분의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대통령으로서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관련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1995년 한·중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당시 일본 총무상이 “식민지 시절 좋은 일도 있었다”고 한 망언을 겨냥해 일본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

-1997년 LA다저스 박찬호 선수 가족 초청 오찬에서

 
국민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1999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회동에서


그렇게 (화해했다고) 봐도 좋다. 이제 그럴 때가 온 것도 아니냐.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일 전 문병 뒤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쉽고도 안타깝다.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고 생각한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쿠데타 세력이 제일 나쁘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로 국민들을 괴롭혔던 것을 다 잊어버린 것 같다.

-2010년 5월 취임 인사차 들른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에게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

-2010년 8·15 때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자신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함께 초대하자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다. 별 것 아닐 것.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한 김문수 경기지사가 김영삼 대통령을 예방해 "이번에는 토끼(김문수)가 사자(박근혜)를 잡는 격"이라고 하자 박근혜 의원을 비난하면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을 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비판하며

출처 - 레몬 박기자의 카메라 여행

 

국가 채무 상환에 실패한 그리스

 

국제통화기금(IMF)이 정한 기한인 6월 30일까지 15억 5000만 유로(약 1조 9000억 원) 채무 상환에 실패함으로써 그리스가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서양 문명이 일찍이 꽃피운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한 그리스. 천혜의 자연과 문화 자원을 자랑하던 그리스가 IMF 71년 역사상 선진국 가운데 처음으로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IMF 채무 상환을 하지 않은 나라는 짐바브웨, 수단과 같은 개발도상국들이었습니다. 

 

현시점에 IMF는 그리스의 채무 상환 실패를 '디폴트(채무불이행)'가 아닌 '체납'으로 규정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는 기술적인 용어 선정의 문제일 뿐 사람들은 사실상 이를 디폴트로 받아들이고 있어 그리스 사태가 유로존과 전 세계 경제에 미칠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상황입니다.


출처 - SBS


지난 5년의 IMF 기간에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은 25퍼센트나 하락했습니다. 2010년 당시 3100억 유로였던 그리스의 부채는 2015년 현재 3170억 유로로 늘었습니다. 또한 50퍼센트에 달하는 청년실업률이 방증하듯 그리스 경제의 위험도는 해마다 심화되어 왔습니다. 이번에 부채를 상환하지 못한 그리스로서는 IMF의 추가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다른 경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가능성마저 극히 낮아 보입니다. 

 

현재 그리스에서는 영업을 중단한 은행 ATM 앞에서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장 병원비를 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부터 생필품과 연료를 사재기하려는 사람들마저 속출하는 실정입니다. 각 주유소의 휘발유도 다 떨어져 고객 한 명당 20유로(약 2만 5000원)어치 이상 휘발유를 살 수 없게끔 제한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조차 국회 안 ATM에서 하루 인출 상한 금액(60유로)으로 정해진 돈을 찾으려고 줄을 서는 광경을 연출한다고 하니 정말 심각한 상황이긴 한 모양입니다.

 

출처 - 월스트리트저널

 

지난 5년간 혹독한 긴축 경제 정책에 시달려온 그리스 국민으로서는 이번 사태가 분노를 넘어 자포자기의 심정을 느끼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까닭에 향후 그리스 경제와 사회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그리스의 국가 신용등급은 CCC-까지 떨어졌고 그리스 4대 주요 은행의 신용등급은 CCC에서 RD(제한적 채무불이행) 상태로까지 떨어졌습니다. 현재 그리스 경제는 유럽중앙은행(ECB)의 긴급유동성지원(ELA)이라는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지경입니다. 그리스의 총부채는 2015년 7월 현재 3170억 유로(약 394조 원)으로 GDP의 2배에 달하는 규모라고 합니다. 
 

출처 - 한겨레


 

그리스 경제, 왜 이 지경이 됐나?

 

풍부한 문화유산과 선박왕이 즐비한 나라로 유명하던 그리스가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상황에 이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국민이 게을러서거나 항간에 떠도는 무분별한 복지 지출 같은 이유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인은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한 해 평균 근로시간이 2000시간을 넘을 정도로 열심히 일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에 이어 3위에 해당하며, 독일과 비교한다면 50퍼센트 가까이 일을 더 많이 한다는 얘깁니다. 복지 지출 역시 원인이 아닙니다. 2007년 위기가 찾아오기 직전 그리스의 GDP 대비 복지 지출 비중은 21퍼센트로, 28퍼센트에 달한 독일이나 스웨덴보다 낮았습니다.

출처 - 동아일보


그리스의 경제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탈세와 부패였습니다. 국민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해운업으로 부를 일군 부자들이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탈세를 일삼으니 나라 곳간이 멀쩡할 리 없겠죠. 이와 관련된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2008년 그리스 부자들이 집에 딸린 수영장에 붙는 세금인 500유로(약 60만 원)를 내지 않으려고 국가에 신고를 누락했습니다. 자기 집에 수영장이 있다고 제대로 신고한 부자는 324명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보다 부자가 많은 게 명확하기에 당시 한 세무 공무원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구글의 위성 지도 프로그램인 구글 어스를 이용하여 부자들이 사는 지역에 보이는 파란색 사각형, 즉 수영장 개수를 헤아린 것이죠. 그랬더니 무려 1만 6974개의 수영장이 발견됐습니다. 이는 부자의 98퍼센트가 수영장 세를 포탈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그 이후 부자들이 세금을 제대로 냈을까요? 아닙니다. 부자들은 수영장 바닥을 땅이나 잔디와 같은 색으로 칠하거나 수영장에 덮개를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면 국가가 세금 포탈을 막기 위해 강제 집행이라도 해야 할 텐데 뇌물로 인한 부패가 만연한 탓에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언론의 호들갑도 마찬가지였고요.

 

출처 - 동아일보


정부의 부패와 부자들의 탈세로 국가 경제가 휘청거리자 그리스 정부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의 지갑을 터는 거였죠.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어 고용주가 노동자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우리나라의 연말정산 대혼란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서민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정책에 대항해 그리스의 성난 노동자들은 납세 거부 운동을 펼치는 식으로 대응했으나 그리스의 거부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스위스 등의 조세 회피처로 옮겨놓은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5년 전 IMF로부터 수천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고도 왜 그리스의 경제는 회복되지 못했을까요? 전문가들은 구제금융이 그리스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빚을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합니다. 앞서 《한겨레》에서 인용한 도표에 잘 나와 있듯이, 구제금융의 약 92퍼센트가 부채 탕감과 관련하여 국내외 은행들에 지급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는 빌린 돈의 절반 이상을 부채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만 썼습니다. 실질적으로 국내 경제 신장을 위해 사용할 자금의 여력이 별로 없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상황을 내버려둔 결과 그리스는 지금과 같은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의 이번 체납이 단지 그리스 일국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스의 경제 위기는 유로존 전체 그리고 나아가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출처 - SBS


오는 5일 그리스는 국제 채권단의 추가 긴축안을 수용할지에 대해 국민투표를 시행합니다. 국민의 총의가 국제 채권단과의 협상에서 무기가 될 것으로 정치권이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경제 전문가와 정부가 판단해야 할 문제를 그리스 국민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찬성이나 1번이 위로 배치되는 투표용지와 달리 반대를 맨 위로 올린 투표용지를 만들기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국민의 뜻을 물어 채권단의 제안을 거부하는 결정이 나온다면 이는 유로존을 탈퇴하겠다는 이른바 그렉시트가 현실이 됨을 의미합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스티글리츠와 크루그먼 같은 이들은 그리스에 차라리 그렉시트를 택하라며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주권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보다 국민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라는 조언이겠지요. 그러나 현재 그리스 여론은 국제 채권단이 요구한 긴축안은 견딜 수 없다고 보면서도 유로존을 떠날 때 발생할 사회적 혼란을 더 걱정하는 추세입니다.

 

출처 - 뉴시스


유로존의 선도국인 독일의 입장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다면 통화로서의 유로의 위상이 위협받게 될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통합을 위해 박차를 가했던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유로 가입국도 자기 편할 대로 탈퇴를 할 빌미가 생겨 결과적으로 유로 붕괴의 입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의 최대 채권국이자 유로 성립 당시 다른 회원국의 반대와 위태로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를 유로에 끌어들인 독일로서는 유럽 내에서 정치력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은 미국대로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에서 그리스가 유로를 탈퇴해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국의 상황이 정략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세계 금융 시장은 그리스의 체납 소식을 심각히 받아들이고 모든 지수가 폭락했죠.

 

IMF 구제금융 시기를 극복한 우리는?

 

1997년에 우리나라도 외환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는 동남아시아를 덮친 외환위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남아 국가들의 채권을 상환하는 와중에 우리의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이와 맞물려 개발독재에 따른 금융기관들의 부실, 한국의 위기 상황에 편승해 알짜 기업을 헐값에 인수하려 했던 해외 투기자본의 횡포 때문에 결국 대한민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그 대신 IMF에서 요구하는 여러 조건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경제는 사실상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IMF를 통해 세계 자본가들은 아주 가혹한 긴축처방을 요구했습니다. 이로써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이 개방되었죠. 노동 유연화라는 허울로 근로자의 정리해고가 쉽게 이뤄지고 비정규직이 활성화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경제는 당시 고환율과 글로벌 경기회복에 편승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 MBC


IMF 구제금융 시대를 극복한 이후 한국 경제는 과연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을까요? 이번에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한 그리스의 체납액 15억 5000만 유로(약 1조 9000억 원)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예산 22조 원의 12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를 보면 거짓말쟁이 대통령을 뽑은 탓에 허비된 혈세가 과연 얼마나 엄청난 금액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가계부채,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IMF도 부정한 낙수효과를 아직도 부르짖으며 탈세에 앞장서는 대기업 등, 그리스의 현실은 남 얘기가 아닙니다. 그리스가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정부의 부패와 부자들의 탈세였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치, 경제의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2의 IMF 사태를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출처 - 민중의소리

출처 - 경향신문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올해 뜻하지 않게 찾아온 극심한 폭염으로 생활하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예년보다 가물어 농부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요, 요사이 충남권에 내린 집중호우로 이젠 물 때문에 시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최첨단 기술시대에도 농사는 여전히 대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올해 가뭄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지난 6월 초까지만 해도 안정적이던 세계 곡물가격이 7월 들어 20~40퍼센트나 급등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미국 중서부와 남미, 러시아 등 세계 주요 곡물 생산 지역이 가뭄 탓으로 작황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1400만 톤 이상의 곡물을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식량안보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곡물 자급률이 329퍼센트에 이르고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주요 선진국도 100퍼센트를 넘습니다. 자급률이 낮은 상황에서 외국 수출국의 공급량이 달릴 경우 해당 물가는 4배 이상 급등한다는 통계가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이제는 식량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1980년 전국이 냉해 피해를 당했을 때 한국 곡물시장의 80퍼센트를 차지한 미국 곡물메이저 카길사가 한국에 대한 쌀수출 가격을 세 배나 올려 요구한 전례가 있습니다. 식량과 사료용을 불문하고 우리나라가 곡물 자급률을 높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식량위기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다

1956년 이래 최악의 폭염과 가뭄이 세계 최대 옥수수 생산국인 미국과 세계 3대 밀수출국인 러시아와 남미 우크라이나 등을 휩쓸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 달 만에 세계 옥수수 생산량은 17퍼센트, 콩 생산량은 12퍼센트가 줄었습니다. 옥수수와 밀 가격은 각각 45.6퍼센트, 44.4퍼센트나 치솟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식량 수출국인 미국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이런 상황은 세계적인 식량가격 폭등을 유발해 경기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 중서부 대평원의 극심한 가뭄으로 옥수수 밭이 말라가고 있다.

가뭄 때는 곡물 생산량이 줄어 가격이 오르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투기성 '곡물 사재기' 현상입니다. 이는 곡물 가격을 더욱 부추겨 안정적인 곡물가격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미국 시카고 상품거래소에서 2012년 9월 인도분 옥수수 선물가격은 부셸(곡물 중량 단위, 옥수수의 경우 25.4kg)당 8.10달러를 보이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옥수수 가격이 8달러대에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2007, 2008년 곡물 파동 때보다도 높은 수준에 해당합니다. 옥수수 가격이 50퍼센트 상승하는 경우 식량가격이 평균 1퍼센트 오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옥수수 가격이 중요한가?

그렇다면 옥수수 가격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식량이라고 할 때 우리는 주로 쌀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곡물은 옥수수입니다. 그다음으로 밀, 쌀 순서입니다. 옥수수는 거의 모든 가공식품의 원료가 된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작물입니다. 옥수수에서 액상과당을 추출하여 청량음료, 주스, 과자를 만들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요 가공식품 1500종 가운데 약 1300종에 옥수수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그 산업적 중요성을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이렇게 중요한 옥수수를 우리나라는 얼마나 생산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옥수수 자급률은 1퍼센트밖에 되지 않아 해마다 1000만 톤을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라고 하는군요. 옥수수 가격이 국제적으로 상승하면 축산 농가의 사룟값 부담이 늘어나는 까닭에 소나 돼지 등의 육류가격도 인상됩니다. 그러다 한계점에 달하면 축산 농가는 사육을 사실상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면 육류 가격은 일시적으로 내려가겠지만, 대량 도축의 파장으로 우유, 치즈, 버터 등의 생산량이 감소하여 낙농품 가격이 오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식으로 곡물가격의 상승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경제운용의 기본인 물가체계를 뒤흔드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생활비가 오르고 인건비 상승압력이 높아져 경제가 안정될 리 없죠. 최근 글로벌 애그플레이션(곡물가격상승) 공포가 확산하자 불똥이 바이오연료인 '에탄올'로 번지고 있습니다. 가뭄 때문에 옥수수 수확량이 급감했는데, 상당 물량이 에탄올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바람에 옥수수 가격폭등을 부추긴다는 얘깁니다. 56년 만에 미국 중서부를 덮친 최악의 가뭄 탓으로 지난 6월 초 톤당 200달러가 조금 넘던 옥수수 국제 거래가격은 현재 300달러를 웃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출처: 한국일보)

지난 2007년 제정된 에너지법에 따라 미국은 수확된 옥수수의 일정량을 에탄올 생산에 사용해왔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올해는 전체 수확분의 42퍼센트인 45억 부셸이 에탄올 원료로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사상 최악의 흉작에 거둬들인 옥수수의 절반을 에탄올 생산으로 돌려야 하니 국제 곡물가격은 갈수록 폭등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는 셈이죠.

우리의 밥상, 무엇이 문제인가?

정부는 지금까지 가격경쟁력이 없고 쌀 소비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논농사 면적을 줄이도록 유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쌀을 비롯한 전반적인 곡물생산계획을 다시 짜야 할 시점입니다. 비록 생산비가 외국에 비해 비싸더라도 자급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식량자급률이 낮을수록 세계적인 곡물메이저들의 손에 우리의 밥상이 놀아날 위험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식량자급률이 최하위(26%)에 속합니다. 식량자급률이 낮지만 일본이나 스위스 같은 국가는 식량안보 차원에서 항시 곡물을 충분히 확보하는 체계를 갖춰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간 세계적인 식량위기의 전조가 보일 때마다 수입곡물 할당관세 적용, 사료구매자금 저리 지원, 조사료 재배 확대 같은 단기 대책 외에 국가조달시스템 구축, 해외농업개발, 비축제도, 조기경보시스템 운영 등의 대책을 시행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합대책이 하나의 국가적인 시스템으로 잘 정착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감지될 때마다 일시적으로 급등했던 국제 곡물가격이 몇 개월 지나 안정세로 돌아서면 국민의 관심이 떨어져 관련 대책의 추진동력이 약해지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국민소득이 높아져 가계에서 식료품 지출 비중이 낮아지고 쌀이 남아도는 까닭에 식량 부족을 우려하지 않는 인식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식량은 에너지와 달리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할 자원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국가안보 차원에서 문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식량도 해외나 국제교역시장에서 확보해야 할 중요한 자원의 하나로 보고 비상시를 대비하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뤄야 할 때입니다.

누가 우리의 밥상을 움직이는가?

쌀 소비가 갈수록 줄어들어 우리 쌀이 남아도는 상황인데도 세계적인 개방 압력을 타고 더 많은 쌀이 수입되고 있습니다.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우리 쌀은 오래지 않아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식량자급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분들은 저렴한 쌀을 먹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계적인 곡물메이저인 카길을 비롯한 다국적 곡물상들이 추구하는 시나리오대로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생산성이 낮은 농업에 매달리기보다 휴대전화처럼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저렴한 식량을 사 먹는다면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농업을 포기하면 바로 뒤이어 식량재앙이 닥칩니다. 많은 전문가는 식량이 21세기 최고의 전략 무기가 될 것이며, 그 가공할 무기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의 밥상을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 곡물의 자급 비율은 현재 26퍼센트대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나마 쌀을 빼면 2.7%에 불과하죠. 한정된 토지에 인구가 많으니 낮은 식량 자급률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나 진실은 이런 낮은 식량자급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나라의 식량위기에 한몫을 한 것은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미국이 장려한 자유시장 정책이었습니다. 멕시코의 식량위기는 1980년대 초에 불어닥친 부채위기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당시 개발도상국가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채가 많았던 멕시코는 국제 민간은행에 대한 부채 상환을 위해 세계은행과 IMF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세계은행과 IMF는 자체적으로 마련한 경제정책 프로그램을 멕시코 정부에 제시합니다. 고율의 관세를 비롯, 각종 무역규제를 없애고 이를 위해 멕시코 정부가 제도적으로 지원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골자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겠다는 노골적인 계획이 담긴 경제정책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구조조정’이란 명목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농민을 위한 각종 지원정책을 펴왔으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이 같은 정부 지원을 모두 없애버린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정부 지원이 갑작스럽게 중단되거나 급격히 줄어들자 멕시코 농업의 생산성은 크게 하락합니다. 여기에 1980년대 들어 실시한 일방적인 농산물 무역자유화 조치로 농민의 기반은 더욱 허물어졌고, 1990년대 중반에는 NAFTA가 발효되면서 그동안 자급했던 옥수수마저 수입하더니 결국 식량 수입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카길, ADM, 타이슨 같은 다국적 농산물기업들은 자기들 정부에 끊임없이 로비를 펼치고, 그 정부는 각종 무역협상 테이블에서 충실하게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은 엄청난 농산물 수출국이며 한동안 WTO를 쥐락펴락해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추구하는 다자간 협상이 잘 진척되지 않으니 아예 1대 1로 만나 각국과 FTA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미FTA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네요. 

대량생산 방식의 농업체계를 돌아볼 시점이 되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자연스럽고 현명한 농업방식에서 억지로 이탈시키고 산업화시켜 불구로 만듭니다. 자급자족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고 모두를 곡물메이저의 고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다국적기업인 곡물메이저는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세계 각국의 소농과 가족농을 다 죽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전 세계의 먹을거리를 단 몇 개의 다국적 농산물기업이 주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먹거리를 통제할 힘을 상실한다면 우리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문제인식을 전 국민이 함께해야 할 때입니다.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의 피해 상황으로 세계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싫겠지만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천재인 대지진에 도쿄전력, 일본 정부의 무능력과 실책이란 인재까지 더해져 발생한 상황이라 보는 이를 더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도움을 받기로 한 이상 모쪼록 일본에 살고 계시는 분들께 더는 큰 피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빕니다.

요즘 각 언론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번 일본의 대재앙과 관련해 대지진과 쓰나미, 원자력발전소 멜트다운 위험 문제 옆에는 꼭 주식시장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자가 수만 명을 헤아리게 될지도 모를 '일본 전후 최대의 위기'라는 이 사태를 다루면서 국제적인 주식시장에 대한 기사와 국내 증시에 관한 내용을 함께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주식시장은 단순히 경제적 지표뿐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한 국가가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하는 경제적 척도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원래부터 주식(증권)은 극단적인 위험으로부터 큰 이익을 취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니까요.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고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유럽과 동양 사이에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른바 대항해 시대의 서막인데요. 이로써 유럽 사람들은 동양의 금은보화와 진귀한 물자를 배로 싣고 유럽으로 되돌아가 되파는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바다'라는 대자연이었습니다. 개척 항로 무역을 통한 이익은 태풍을 비롯한 예상할 수 없는 천재지변을 극복해야만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해적선의 약탈까지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성공하기만 하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지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어도 안전을 보장하기 힘든 위험천만한 성공률 때문에 사람들은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극단적 투기성 무역을 위해 주식 형태의 증서를 발행함으로써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증권의 시작이지요.

이런 동서양 해상무역이 나날이 발전하자 1602년 마침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니 세계 증권시장의 역사는 이제 400년이 조금 넘는 셈이군요.


유럽에서 시작되었으나 현재 세계경제와 주식시장의 중심은 미국, 그중에서도 월스트리트라고 할 수 있죠. 250여 년 전 뉴욕 월스트리트를 따라 맨해튼 쪽에 유럽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을 하역하는 선착장이 있었는데, 물품 대신 송장(invoice)을 근거로 거래가 이뤄졌습니다. 화폐가 없던 시절이라 은으로 만든 막대를 사용해 거래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곧 뉴욕 증시의 시작이라고 하는군요. 이 전통에 따라 아직도 뉴욕증시는 주가를 소수점이 아닌 1/8단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대항해 시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끼리의 무역이 주식의 시초가 되었네요.

그리고 1789년 미국 정부는 남북전쟁 비용을 조달하고자 최초로 정부채권을 발행했고 뒤이어 은행·보험사들이 거래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재지변에 이어서 이번에는 전쟁이라니 주식의 역사에서 위험성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위험성은 결국 투기로 말미암은 고공비행 끝에 1929년 주가 폭락과 더불어 대공황을 유발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셈이지만 이때부터 미국에 증권감독원이 생겨 주식시장에 증시 안정을 위한 제대로 된 규정과 감독기관이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30년 일제강점기에 '취인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증권시장은 해방 이후 1956년 현대적인 의미의 증권거래소를 개장했지만, 상장회사도 투자자도 여력이 거의 없던 시절인지라 거래는 미미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말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특별법과 1970년대에 들어서 투자신탁회사가 설립되어 기관투자자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업공개촉진법의 반강제적인 도입으로 1970년대 말부터 상장기업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국제화 단계에서 삐끗하게 되어 1997년 IMF 사태가 터졌죠.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코스피(KOSPI) 지수가 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럽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우리나라든 원인이 무엇이건, 과열 후 폭락 그리고 재조정은 주식시장에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국가 간의 주식시장은 점점 더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주식은 시작부터 위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번 일본 대지진과 주가 위기가 세계 경제와 주식 역사 속에 어떤 족적을 남기게 될까요? 부디 대재앙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려는 간사한 세력이 나타나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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